레이샹린(雷祥麟)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와 국립양밍대학 과학기술학연구소에서 근대 중국 의학사와 과학사를 연구하고 있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화학과 과학사를 공부했다. 전통 의학과 공중보건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했으며, 최근에는 중국의학에서 임상 연구가 등장한 역사적 궤적을 탐구하고 있다. 《비려비마: 중국의 근대성과 의학》을 비롯하여 다수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루쉰

본명 저우수런周樹人.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소설집 《외침吶喊》과 《방황彷徨》 그리고 《화개집華蓋集》, 《이이집而已集》, 《차개정잡문且介亭雜文》 등에 수록된 수많은 수필과 비평으로 중국 현대문학의 기틀을 다진 선구자로서 훗날 마오쩌둥에게 “루쉰의 방향이 바로 중국 민족 신문화의 방향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루쉰은 소설과 산문 외에도 별도로 89편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고대와 근대에 걸친 삶의 이력으로 인해 구어문으로 쓴 현대시가 35편, 고문으로 쓴 고전시가 54편이며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1927년 발표된 《들풀野草》에 수록된 산문시 23편이다. 이 시들에서 루쉰은 산문에서와는 달리 본인의 존재론적 고뇌와 일상의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독일의 사회학자. 1927년 독일 뤼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군에 징집되어 복무했고 전후 미군 포로 생활을 거친 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52년 즈음부터 철학, 문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민속학 문헌에 대한 메모 카드를 작성해 사회학이론의 대상이 되는 모든 학문으로 관심을 확장했고 이를 평생 지속한다. 1954년부터 뤼네부르크 고등 행정 법원에서 행정 공무원으로, 니더작센주 문화교육부에서 고등 사무관으로 재직했다. 1958년 첫 논문 〈행정학에서의 기능 개념〉을 발표했으며 1960년에 하버드 대학교로 연구 휴가를 떠나 탤컷 파슨스와 깊은 사회학적 교류를 가진다. 이후 조직, 행정, 정치, 법을 체계이론으로 재구축해 사회학이론을 정초하면서 공동 저작과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6년 박사 학위와 교수 자격을 동시에 취득했고 1968년 빌레펠트 대학교의 첫 번째 교수이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당시 독일 지역 최초의 사회학과 교수 자리였다. 《열정으로서의 사랑》, 《사회적 체계들》, 《예술체계이론》, 《사회의 사회》 등을 비롯한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으며 1998년 빌레펠트 근교 외를링하우젠에서 타계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년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다. 릴케의 어머니는 릴케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르네Rene라 짓고, 여섯 살까지 딸처럼 키웠다. 열한 살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로베르트 무질의 첫 장편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의 배경이 되는 육군고등사관학교로 옮기나 결국 자퇴한다. 1895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하고서 1896년 뮌헨으로 대학을 옮기는데, 뮌헨에서 릴케는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독일식 이름인 라이너로 바꿔 필명으로 사용한다.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나 결혼한다. 1902년 파리에서 로댕을 만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는다. 클라라와 헤어진 릴케는 로마에 머무르며 《말테의 수기》를 완성하였으며, 이후 1911년에 마리 폰 투른 운트 탁시스-호엔로에 후작 부인의 호의로 두이노 성에서 겨울을 보낸다. 이곳에서 바로 전 세계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될 릴케 만년의 대작이며 10년이 걸려 완성할 《두이노 비가》의 집필을 시작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릴케는 스위스의 뮈조트 성에 머무는데, 이곳에서 그는 폴 발레리 등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낸다. 발레리의 작품을 독어로 번역하고 또 직접 프랑스어로 시를 쓰던 시인은 1926년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죽는다.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년 10월 20일 프랑스 시골 소도시 샤를빌에서 태어나 강퍅한 홀어머니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라틴어 작문 대회에서 수차례 입상한 우등생이었으나, 열다섯 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에 몰두하며 부르주아사회의 불의와 종교의 위선을 규탄하는 시를 썼다. 가출을 되풀이하다 중학교를 마치기 전 학교를 그만두고 파리코뮌에 열광하며 삶의 변혁을 이끌 언어를 모색한다. 자신의 작품을 여러 시인에게 보내던 중 1871년 베를렌의 도움을 받아 상경, 파리 시인들의 모임에서 일약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무분별한 도발로 이내 문단에서 멀어지고, 1872년 베를렌과 파리를 떠나 브뤼셀, 런던을 전전하며 함께 생활하지만 둘의 관계도 한 해 만에 파국으로 끝난다. 1873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완성했으나 인쇄 대금을 치르지 못해 책이 유통되지 않았고, 이듬해 엮은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의 원고 역시 미간 상태로 남는다. 1875년 무렵 돌연 글쓰기를 그만두고 세계 각지를 방랑하다 아프리카에 자리 잡는다. 베를렌 등의 노력으로 1880년대부터 그의 시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대담한 형식, 강렬한 이미지로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키지만 상인이 된 랭보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1891년 골수암에 걸려 프랑스로 돌아와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은 뒤 그해 11월 10일 마르세유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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