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나 비뇨치(Juana Bignozzi)

193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후아나 비뇨치는 이민자 출신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랐다. 1950년대 말, 아르헨티나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비뇨치에게 공산주의는 언제나 시의 중심이 되었다. 1974년 아르헨티나에 독재의 그늘이 드리우자 바르셀로나로 떠나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아르헨티나의 젊은 시인들이 《어떤 질서로 움직이는 여자》를 발굴해 재출간했다. 비뇨치는 이 일을 계기로 15년 만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 이후 매년 한 번씩 고향을 찾았다. 2004년에 아르헨티나로 완전히 귀국한 비뇨치는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2000년 당시 전집으로 출간된 이 책에는 《어떤 질서로 움직이는 여자》, 《귀향》, 《시인과 내면 살피기》, 《주요 노선의 출발지》를 비롯해 《세상의 법, 당신의 법》이 담겨 있다. 이후 《시인들이 안드레아 델 사르토를 찾아간다》를 마지막으로 2015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

1457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태어나 1521년 사망했다. 바젤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한 뒤 동 대학의 법학교수가 되었다. 스콜라철학과 인문주의의 세례를 받은 그는 사회 비판과 번역에 관심이 많았다. 법학 저작물과 라틴어 시문학 등 다수 저작물을 번역하면서 작가이자 편집자로 활발한 출판 활동을 벌이던 그는 중세 말기 최대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바보배》(1494)를 출간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독일어로 쓰인 이 운문 작품은 종교개혁 직전의 정치와 종교, 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통렬하게 풍자하고 비판하며 있으며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유베날리스, 플루타르코스 등 고전문학 작품을 비롯해 성서의 잠언과 시편 등 시대를 뛰어넘는 해박한 인용과 교훈들로 채워져 인문학자들의 애독서로 널리 사랑받았다. 독일어권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 번역되어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우인문학의 원조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시대와 후대의 인문주의적 글쓰기에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 《바보배》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더불어 독일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폴 발레리(Paul Valéry)

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세트에서 나고 자랐으며 해양대학에 입학하려다 포기하고 몽펠리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부터 앙드레 지드와 말라르메 등과 교우했는데 스물이 채 되지도 않은 나이에 이미 문학가로서 필력을 인정받았다. 법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892년, 감수성의 혁명을 겪는다. 이 사건이 발레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고, 이를 계기로 스물네 살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Introduction à la méthode de Léonard de Vinci〉(1895)과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 문단에 각인시킨 〈테스트 씨와 함께한 저녁La soirée avec monsieur Teste〉(1896)을 세상에 내놓는다. 1897년부터 1917년까지 이십 년 동안 문학적 칩거에 들어가 정신의 내적 기능을 연구하고 자신의 잠재 지성을 발전시키는 데 집중하며 대외적 작품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러한 침묵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계속되었으나, 1917년에 〈젊은 파르크La Jeune Parque〉를 발표하며 인생에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하고 유럽 전역에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청년 시절에 쓴 시들을 《옛 시 모음집Album de vers anciens》(1920)으로 묶고, 〈해변의 묘지〉, 〈나르시스 단장〉 등을 한데 모아 《매혹Charmes》(1922)으로 출간했다. 《바리에테》, 《외팔리노스》, 《드가, 춤, 데생》 등을 발표하며 평생 문학인으로 살다 1945년 생을 마감했다. 사후작으로는 《나의 파우스트》 등이 있다.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년 6월, 함부르크의 유대인 은행가 모리츠 바르부르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은행가나 의사가 되라는 부친의 말을 거역하고 본 대학교에서 미술사와 역사, 고고학을 전공하며 카를 위스티의 미술사, 헤르만 우제너의 고대 종교사, 카를 람프레히트의 심리학적 문화사 강의를 들었다. 1891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봄〉: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 고대 표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피렌체에 체류하며 1895년 〈1589년 막간극을 위한 연극 의상〉을 발표했다. 1896년부터 1897년 북아메리카 인디언 구역을 여행하며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원시적 인간의 불멸성”을 실증했다. 1906년에는 브레슬라우 대학교, 1912년에는 할레 대학교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독립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전쟁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팸플릿 등을 수집하며 전쟁 소식에 몰두하다, 1918년 피해망상을 동반한 정신 착란으로 병원에 이송된 뒤 1921년부터 1924년 8월까지 크로이츠링겐 벨뷔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1926년 바르부르크 문화학 도서관을 개관하고 강연과 전시, 출판 등의 학술 활동을 벌였다. 1927년부터 〈이미지 아틀라스 므네모시네〉 프로젝트에 매달리다 1929년 10월 심장 발작으로 함부르크 자택에서 사망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911년부터 버트런드 러셀과 교류하며 논리학과 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 대전 참전 중에 《논리철학논고》(1921)를 집필하고, 철학의 모든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음을 선언한 뒤에 학계를 떠났다. 192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와 평생 철학을 가르쳤으며, 1951년 사망했다. 논리학, 수리철학, 심리철학, 언어철학 분야에서 《철학적 탐구》(1953)를 비롯한 많은 저작을 유고로 남겼다. 작품과 삶에서 드러나는 실존적 자세, 완벽주의, 독특한 성격으로 철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폭넓은 영향을 끼쳤으며, 20세기 이후의 철학에 가장 강력한 흔적을 남긴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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