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본명 앙투안 마리 조제프 아르토(Antoine Marie Joseph Artaud). 1896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18세부터 각종 신경성 질환 때문에 유럽 각지의 요양·치료 시설을 전전했다. 1920년 정신과 의사 에두아르 툴루즈가 있는 파리로 상경해, 그가 편찬하던 《드맹(Demain)》지에 시와 서평을 썼다. 1921년 샤를 뒬랭 극단의 배우로 연극에 입문했다. 1923년 잡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La Nouvelle Revue Française)》에 시 두 편을 보냈으나 게재 거부되었고, 이 과정에서 편집인 자크 리비에르와 주고받은 서신이 1924년 출간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문단에 들어서며 1925년 다양한 장르의 짧은 글을 모은 《신경저울(Le Pèse-Nerfs)》, 《림보의 배꼽(L’Ombilic des Limbes)》을 발표했다. 초현실주의에 참여하고 영화 배우로 활약했으며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1926년 알프레드 자리 극단을 만들어 실험적 연극을 연출했다. 1931년 파리 식민박람회에서 본 발리 춤에 영감을 받아 ‘잔혹극’으로 대표되는 고유의 연극론을 쓰기 시작했다. 1935년 잔혹극 《첸치 일가》가 실패한 뒤 멕시코와 아일랜드를 여행했다. 1937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로 강제 추방된 후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입원 중이던 1938년 연극론 《연극과 그 이중》이 출간되었다. 1946년 퇴원 후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를 집필하고, 직접 그린 초상화와 데생으로 전시회를 준비하며 여러 편의 글을 썼다. 1948년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로 생트뵈브 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파리 근교 이브리의 요양원에서 직장암 혹은 마약성 진통제 과용으로 사망했다.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 II Алексеевна)

18세기 러시아의 대제이자 계몽 군주. 본명은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 폰 안할트체르프스트(Sophie Auguste Friederike von Anhalt-Zerbst)로 1729년 4월 21일 프로이센의 소공국 슈테틴에서 태어났다. 1744년 겨울, 조피는 러시아에 도착하는데, 러시아 황제 옐리자베타가 자신의 후계자로 정한 미래의 표트르 3세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정교회로 개종한 조피는 예카테리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얻는다. 옐리자베타 황제가 사망하고 표트르 3세가 즉위한 지 6개월이 흐른 1762년 6월,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황제 자리에 오른다. 예카테리나가 통치하는 동안 러시아는 유럽 열강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으며 러시아의 문화도 활짝 피었다. 예카테리나는 유럽의 문인과 서한을 교환하며 자신의 개혁을 알리고 조언을 구하며 문인공화국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18세기 러시아의 한 시인은 “표트르는 우리에게 존재를 주었고 예카테리나는 영혼을 주었다”라고 노래했다. 1796년 11월 6일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