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앙리 미쇼
  • 옮긴이 주현진
  • 원제 Cas de folie circulaire(1922)
  • 발행일 2017년 6월 8일
  • 판형 125×200mm
  • 면수 198쪽
  • 정가 12,000원
  • ISBN 9791196014971
  • 전자책 미출간

책 소개

신비주의와 광기의 교차점, 그의 첫 실험보고서
‘주기적 광증의 사례’

독자여! 현명한 내 말을 들어라. 쇠테 두른 술통을 향해 기어가, 네 지하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몸을 숨겨라! 항의하는 너의 어렴풋한 메아리조차 내게 이르지 않도록 하라!

앙리 미쇼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어진 온갖 구획을 날려버리려는 지난한 몸부림을 읽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것을 진짜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한 글쓰기. 현실을 재현하거나 모방하기 위해서 쓰는 시가 아니라 시 자체가 세상의 폭력과 맞서는 힘이 되는, 그 자체가 폭력인 글쓰기. 작품의 논리 속에서 변형된 현실을 통해 오히려 현실을 적나라하게 뒤집어보는 유머, 도대체 이 세상이 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란 말인가, 라고 물어보는 그 절망, 이 세계에서 잠을 깬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하고 의심하는 그 본질인 패배. 이런 것들을 뭉뚱그려 무당의 그것 같은 살풀이가 되게 하려는 글쓰기.

김혜순, 〈추천의 글〉

자기망명자, 앙리 미쇼

한국 독자에게는 다소 생소한 시인 앙리 미쇼는 20세기 서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어떤 이는 시인으로, 또 어떤 이는 화가로 알고 있는 미쇼는 1899년 벨기에 나무르에서 태어났다. 미쇼에게 조국 벨기에는 망명을 간절히 꿈꾸게 만들었다. 실제로 미쇼의 문학작품 속에서 조국, 고향을 표현한 어휘 대부분에는 절망의 기색이 가득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에 의해 브뤼셀자유대학이 폐쇄되자 방황하던 미쇼는 로트레아몽과 쉬페르비엘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1922년 본격적으로 문학 창작에 몰입한다. 1924년, 청년이 된 미쇼는 파리에 정착하면서 문인이자 예술가로 ‘자신’을 만들어간다. 1984년 파리에서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파리’라는 예술의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과 만남을 갖는 동시에 자기 내면의 여러 목소리를 찾아 나선 탐구적 예술가이기도 했다.

미쇼의 삶은 ‘떠남’과 ‘돌아옴’의 연속이었다. 비(非)서구 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우며 여러 곳을 여행했던 미쇼는 남아메리카와 아시아로 돌연히 떠났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의 여정은 길었고, 험난하였고, 형형색색이었다. 그 끝에 창조된 앙리 미쇼의 문학과 그림은 이성과 광기 그 경계에 있다. 그의 문학세계는 내적, 외적 여행에 대한 기록일지와도 같으며, 바깥으로의 여행과 안으로의 여행이 혼합되는 양상이 발견된다. 이 책 《주기적 광증의 사례》는 미쇼의 이 독자적인 문학관의 첫 단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초월자, 앙리 미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20세기 전반, 앙리 미쇼의 문학은 잔혹과 광기가 뒤섞인 세상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미쇼의 첫 작품인 《주기적 광증의 사례》는 자동기술법, 꿈의 기술(記述), 영매술적(오라클) 서술, 창세기 신화로 가득하다. 일반적인 기승전결의 서사가 아닌 충동적인 이미지 묘사와 즉각적 언어의 출현, 원초적인 상상력이 돋보인다.

미쇼는 메스칼린, 마리화나와 같은 환각제의 도움을 받아 글과 그림을 작업했는데, 정형화된 관습과 형식을 이탈해 내면의 초월적인 여러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미쇼는 “메스칼린은 의식화되는 내적 순간들을 다양화시키고 날카롭게 하며, 증폭시키고 강화시킨다”라고 했을 정도로 환각제에 심취해 내면세계를 탐구했다. 이러한 그의 창작 방식 혹은 실험은 20년 동안 계속되었고, 현재 알려진 그의 수많은 데생과 글은 환각제의 취기로 이뤄진 결과였다.

그러나 미쇼는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미숙하다 생각해 일생 동안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초기작의 재판(再版)을 반대할 뿐 아니라 초판본을 파기하려고까지 했다. 초기작에 대한 미쇼의 이러한 외면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문학연구자들은 《주기적 광증의 사례》와 같은 초기 작품들이 그의 문학적 독창성이 드러난다고 평한다. 1998년에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플레이아드 앙리 미쇼 전집이 출간되었고, 그의 ‘첫 글들’은 온전히 정리되었다.


목차

1. 주기적 광증의 사례 6
2. 선로변경통제원 연대기 15
3. 꿈과 다리 27
4. 기원에 관한 우화 41
5. 의자 64
6. 우리의 형제 찰리 67
7. 자살 노트 76
8. 초현실주의 79
9. 유년의 꿈 87
10. 로트레아몽의 사례 94

옮긴이 말 181
추천의 글 — 김혜순 192


책 속에서

독자여! 현명한 내 말을 들어라. 쇠테 두른 술통을 향해 기어가, 네 지하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몸을 숨겨라! 항의하는 너의 어렴풋한 메아리조차 내게 이르지 않도록 하라!

8쪽

모든 관습・도덕・법규에서, 부모들은 어린아이들 및 젊은 세대들의 지능을 단지 안에 가두었다.

18쪽

공간으로부터의 노동자 인간. 현대에는 감지할 수 있는 가속도로 사람의 이동이 이뤄진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공간이 주파된다.

25쪽

특수화는 바벨탑을 무너뜨렸다. 각자 특수한 언어로 말하였다. 그게 우리 시대다.

28쪽

평상시보다 더 많이 활동한 사지는 밤이다. 시큼한 화학 찌꺼기, 위축, 따끔함, 냉기, 간지럼, 딱딱함, 경련, 기진맥진한 근육 주변에 번지는 찌르는 듯한 고통.

34쪽

어떤 물질(인도 대마, 양귀비)은 보통 몸을 깊이 잠들게 하고, 배꼽과 아랫배에 감미롭거나 불쾌한 느낌을 야기한다. 이 부위는 깨어 있어, 아름다운 꿈을 낳는다.

34쪽

인격의 몇몇 부분이 의식 밖으로 내던져지고 희생된다. 생육 불능에 시의적절치 않은 데다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공적 인간의 몸뚱이에 해롭기 때문이다.

37쪽

문학은 광인들, 신경쇠약자들, 편집증 환자들, 술주정뱅이들을 알고 있다. 광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광인이 말을 한다. 광인은 미쳤던 동안에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39쪽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진다. 사탄들은 버틴다. 서로를 움켜쥔다. 위축된다. 결국 바위가 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땅의 기원이다.

43쪽

무감한 찰리, 이것이 아마 찰리의 열쇠이리니. 찰리가 소방관들의 살수 호스로 공연장에다, 분장실의 여인들과 음악가들에게 물을 뿌린다. 우리는 웃는다. 그러나 찰리는 웃지 않는다. 행위의 욕망과 충동을 억누를 수는 없으나, 조금도 즐기는 법이 없다. 어떠한 느낌도 없다.

72쪽

인간에겐 삶의 집착이 없다. 자신의 미래를 광적으로 돌볼 따름이다.

77쪽

널찍한 종이를 한 장 꺼내서, 서 있기보다는 앉아서, 앉아 있기보다는 누워서, 차라리 잠이 든 채로, 모든 것, 모든 주제, 모든 목적에 무심하여라, 오직 상상한 것의 분명한 내용을 곧장 글로 옮겨라.

80쪽

초현실주의적 경이는 단조롭다. 그러나 그 어떤 것과 견주더라도 나는 경이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경이로움 만세! 피상적 경이일지라도 어떻단 말인가. 그 속에 몸을 담그고서 우리는 황홀하다.

87쪽

지은이 | 앙리 미쇼(Henri Michaux)

1899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1955년 프랑스로 귀화 후 1984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1922년 《주기적 광증의 사례》를 비롯한 첫 작품들을 벨기에에서 발표한 이후, 1927년 첫 단행본 《나는 누구였는가》를 프랑스에서 출간하면서 문학인의 삶을 시작한다. 1929년 《에콰도르》와 1933년 《아시아로 간 야만인》을 발표하여 특별한 문학적 위상을 구축한다. 《위대한 가라반으로의 여행》, 《내면의 먼 곳을 뒤따르는 플륌》, 《마술의 나라에서》, 《안의 공간》, 《시련, 구마》, 《접힘 속의 인생》, 《통로들》, 《움직임》, 《잠든 자의 방식, 깨어난 자의 방식》, 《불행한 기적》, 《난간의 기둥》 등 많은 작품을 남겨 동시대와 후대 문학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1937년 첫 미술 작품 전시회를 여는 등 예술가로서도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옮긴이 | 주현진

파리8대학교 비교문학박사. 한국시를 불어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상의 단편집,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La Feuille noire dans la bouche》(2012), 김혜순 《당신의 첫Ordures de tous les pays, unissez-vous!》(2016)을 번역 출간하였다. 2012년 프랑스 문예지 《PO&SIE》의 한국시 특집호 편집 및 번역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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