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마리나 츠베타예바
  • 옮긴이 이종현
  • 원제 поэма конца(1924)
  • 발행일 2020년 4월 29일
  • 판형 125×200mm
  • 면수 320쪽
  • 정가 12000원
  • ISBN 979-11-89433-08-6 04890
  • 전자책 출간(ePub)

책 소개

불운한 러시아의 천재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대표 시집
추방당한 이들을 위한 시인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시집

나는 잃을 것이
없다. 끝에 끝!

〈끝의 시〉 중에서

불운한 러시아의 천재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대표 시집 《끝의 시》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츠베타예바의 삶이자 회상이며 꿈의 편린이라고 할 수 있는 마흔다섯 편의 시를 담고 있다. 시를 매우 읽기 어렵게 만드는 하이픈(-), 대시(—), 콜론(:), 세미콜론(;), 느낌표(!) 등 과도할 만큼의 문장부호를 쓰는 시인임과 동시에, 20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그녀는 마치 재봉사처럼 그녀의 삶을 스쳐 지나갔던 시에 대한 열의와 감동을 시어들로 이어 붙여 우리에게 보여주며, 시집 끝에 수록된 그녀가 직접 쓴 일종의 자기소개서인 ‘이력서’의 글은, 보다 풍성하게 그녀의 시와 삶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은 러시아의 천재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파란만장한 시대에 태어나 불운한 삶을 살았던 그녀의 시를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노벨상을 수상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의 ‘리라’의 모델이기도 했으며, 이후 러시아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그녀의 시 여섯 편을 가곡으로 작곡하기도 한다.

더욱더 많이 쓰라, 모든 순간을

1892년 9월 26일 모스크바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츠베타예바는 어머니의 요양으로 인해 어린 시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도 시에 대한 그녀의 열의를 꺾지는 못했다. 1910년 그녀는 10대의 나이로 여섯 살 때부터 써온 시를 모아 첫 시집 《저녁 앨범》을 자비 출간한다.

이 모든 것은 존재했다. 나의 시는 일기고, 나의 시는 고유명사들의 시다.
(…)
더욱더 많이 쓰라! 모든 순간, 모든 손짓, 모든 숨결을 고정하라! 손짓뿐 아니라 그 손짓을 내던진 손의 모양도! 숨결뿐 아니라 —그 가벼운 숨결을 날려 보낸 입술의 윤곽도.

화가 마리야 바시키르체바의 영향을 받은 일종의 일기 시들인 이 시들은 러시아의 학자 미하일 가스파로프에 의해 ‘일상의 시화’라고 불린다. 러시아 상징주의에 반기를 들며 ‘사물들의 반란’을 꿈꾸었던 아방가르드와는 다르게 그녀가 보여주는 일상의 시학은 친숙한 생활의 대상들을 열거하며 내밀한 순간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러시아 문단으로 발을 내디디며, 1920년 연작시 〈백조의 진영〉을 쓰고, 1922년 시집 《베르스타》를 내게 되지만, 러시아혁명 이후의 그녀의 삶은 순탄치 못하게 흘러간다. 둘째 딸 이리나는 대피소에서 기근으로 굶어 죽고, 남편이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에 가담한 사이 첫째 딸 알랴와 함께 체코로 떠나면서, 이후 17년간이나 이어질 긴 해외 생활을 시작한다.

1920-30년대 츠베타예바의 시학은 ‘거–리(距-離)’라는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다. 또한, ‘거-리’는 이 시기 소중한 사람들, 사물들과 항상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그녀의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런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츠베타예바는 남편의 친구인 로드제비치와 열정적인 연애와 이별을 거치는데 이때 〈산의 시〉와 〈끝의 시〉를 완성한다.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는 “열아홉 살 때 츠베타예바의 〈산의 시〉를 읽고 나니 러시아어로 쓰인 그 어떤 글도 마리나가 일으켰던 인상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산의 시〉와 〈끝의 시〉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일반적인 이별 그 자체이지 실제 인물과의 이별이 아니다. 두 편의 시는 분명 연애와 이별의 경험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동시에 ‘끝’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잃을 것이
없다. 끝에 끝!

〈끝의 시〉 중에서

츠베타예바가 도달한 ‘끝의 선언’은 ‘끝’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성찰로도 이어진다. 과연 끝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까?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이름을 붙이고 ‘끝’이라는 의미를 준다면 그것은 정말 ‘끝’일 수 있을까? ‘끝에 끝!’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듬어보는 화자처럼 시를 읽는 우리 또한 ‘ 끝에 끝!’이라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얼굴을 쓰다듬어보게 된다.

“모든 시인은 유대인이다”

세계로부터 추방당했다는 절망감은 시를 발표하지 못하게 된 츠베타예바는 책을 거의 내지 못한다. 1928년에 낸 《러시아를 떠나》가 생전에 출간된 마지막 시집이었다. 파리로 이주한 후에도 그녀는 환대받지 못한다. 그 누구와도 시적으로 소통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녀는 ‘독수리-음모가’들의 연합을 꾸리게 되고, 파스테르나크의 주선으로 당시 스위스에 살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삼각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해 말 릴케가 죽으면서 셋의 서신교환은 중단되고, 결국 릴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그에게 바치는 장시 〈새해에 보내는 편지〉를 쓴다. 릴케 역시 생전에 츠베타예바에게 바치는 시 〈비가〉를 썼는데 이 시들에선 둘의 끈끈한 연대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시적 동지들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어려운 시절을 버티면서도 츠베타예바는 ‘시인은 동시대에 발을 맞추기보다는 외롭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17년간의 고독했던 해외 생활을 마치고 1939년 소련으로 돌아가지만 이후에도 그녀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딸은 체포되고, 남편 세르게이 에프론은 간첩 혐의로 처형당한다. 그리고 그녀 역시 같은 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여러 편의 희곡과 시집을 남겼지만,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츠베타예바는 평생 그녀를 따라다녔던 ‘거-리’를 극복하고 ‘나의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을까? 역자는 이 자살조차 그녀의 “그동안의 삶을 결산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차례

“어려서 쓴 나의 시들아…”  9
나쁜 변명  11
진실  15 
“이러한 부드러움은 어디서 오는지?…”  19 
“마음에 들어요, 당신이 나 때문에…”  23 
“두 개의 태양이 식는다…”  27 
“집시와도 같은 이별의 정열!…”  29 
“나는 진실을 안다!…”  31 
블록에 부치는 시 1 33
“주님이 말했다…” 37
“나는 참칭자가 아니다…” 39
“나는―당신의 펜을 위한 페이지…” 41
“나의 날은 길이 없고 어쭙잖다…” 43
불면증 4 45
“죽으며 말하지 않겠다…” 47
“필요 없는 모든 것―내게로 가져오라…” 49
“나의 자태에 깃든―장교의 강직함…” 53
슬퍼해주세요… 57
학생 7 61
이별 1 63
“한계를 모르는 영혼…” 67
나무들 2 69
오펠리아―왕비를 옹호하며 73
전선(電線) 77

시간의 찬미 85
에우리디케가 — 오르페우스에게: 89
시인들 1  93 
햄릿이 양심과 나눈 대화  97 
막  101
사하라 105
영혼의 시각 1 109
“너, 진실의 허위…” 113
산의 시 115
끝의 시 143
“거―리: 베르스타, 마일…” 233
질투의 시도 237
“내 안의 악마가…” 243
“쉿, 찬미하라!…” 249
“고독: 떠나라…” 255
“핏줄을 열었다: 멈출 수 없이,…” 259
책상 1 261
고아에게 부치는 시 <7> 267
체코에 부치는 시. 3월. 8 269
“첫 줄을 되풀이한다…” 273
“호박 목걸이를 벗을 때가 되었다…” 279

역자 후기 280
주석 309


책 속에서

불면의 밤이 지나면 몸이 약해진다,
몸은 사랑스럽고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느린 핏줄에 화살들이 툴툴거린다 —
넌 세라핌처럼 사람들에게 웃어 보인다.

<불면증 4> 중에서

슬퍼해주세요…
—그가 당신 남편인가?—아니.
—영혼의 부활을 믿어?—아니.
—그렇다면 왜?
도대체 왜 허리 숙여 절을 하는 거지?
—여길 떠나면—
가슴을–주먹으로 칠 테니까:
혹시 혼자 남아 무서워하면—
어떡해?

<슬퍼해주세요…> 중에서

선택받은 자들의 게토! 흙벽과 참호.
자비를 구하지 마라!
모든 세계 중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이 세계에선
시인이—유대인이다!

<끝의 시> 중에서

지은이 | 마리나 츠베타예바(Марина Цветаева)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첫 시집 《저녁의 앨범》(1910)을 발표했다. 어떤 동인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창작의 길을 걷던 중 혁명이 일어나자 1922년 딸과 함께 프라하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콘스탄틴 로드제비치와 사랑에 빠져 포에마 〈끝의 시〉를 썼다. 1925년에는 파리로 이주했고, 1926년에는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셋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러시아로 돌아온 뒤에는 남편과 딸의 체포, 소비에트 문단으로부터의 고립, 극도의 궁핍 등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타타르스탄의 옐라부가로 피난했다가 1941년 8월 31일 목을 매 자살했다. 대표작으로는 시집 《수공업》(1923), 《러시아를 떠나》(1928), 포에마 〈쥐잡이〉(1925) 등이 있다.


옮긴이 | 이종현

서울에서 태어나 러시아문학을 공부했고 모스크바에서 20세기 러시아 서정시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으로 웹진 〈인-무브〉에 20세기 후반 러시아 시를 번역하고 소개하는 〈러시아 현대시 읽기〉를 연재 중이다. 역서로는 LGBT 세계시선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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