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예카테리나 2세
  • 옮긴이 김민철·이승은
  • 발행일 2022년 4월 5일
  • 판형 132×225mm
  • 면수 264쪽
  • 정가 18,000원
  • ISBN 9791189433437
  • 전자책 미출간


책 소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겁니다.”
국제 정치의 객체에서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여성으로 
러시아의 계몽 군주 예카테리나 대제의 여정

표트르는 우리에게 존재를 주었고, 예카테리나는 영혼을 주었다.

18세기 러시아 시인

18세기 러시아의 대제이자 계몽 군주였던 예카테리나 2세의 서한이 읻다의 서한집 시리즈 ‘상응’ 네 번째 책 《예카테리나 서한집》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의 문인 볼테르,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장 르 롱 달랑베르, 조각가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 살롱 주인이자 지식인인 마리테레즈 로데 조프랭 등 계몽 시대 유럽과 러시아의 정치와 사상, 문화를 움직였던 인물들에게 쓴 서한이 실려 있다. 예카테리나 대제라는 역사적 인물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책은 이 서한집이 국내 처음으로, 제정러시아사와 프랑스혁명사를 연구하는 두 옮긴이가 당대의 정치 및 지성사의 주된 흐름을 보여주는 편지 46통을 가려 뽑았다. 책 말미에는 옮긴이 해제와 연보를 수록하여 18세기 러시아를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일을 추진하고 위협을 무릅써야겠어요.”
입법위원회 설립부터 영토 확장까지
문명의 승리를 이끌 유럽 정세의 주역에 오르다

혼자 되뇌었어요. 러시아는 이 전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러시아가 용감한 불굴의 민족이고, 러시아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영웅을 이루는 자질을 모두 갖춘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러시아에 자원이 부족하지 않으며, 러시아가 자원을 소모하지 않았고, 그보다는 부당하게 공격을 당했을 때 스스로를 방어하고 높은 기세로 수월하게 전쟁에 임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771년 7월 22일 볼테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예카테리나 대제’로 널리 알려진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1762~1796 재위)는 조피 아우구스테 프레데리케 폰 안할트체르프스트라는 이름으로 프로이센 소공국 슈테틴에서 태어났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온 조피는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여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을 얻었다. 황위 계승자를 출산하기 위해 타국에 온 황태자비가 그렇듯, 예카테리나 2세는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채 지루하고 고독한 나날을 읽고 쓰는 데 보내며 힘을 길렀다. 남편인 표트르 3세가 즉위하고 얼마 뒤, 예카테리나 2세는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여 제위를 차지했다.

즉위 이후 예카테리나 2세는 사회의 각 인구 집단에서 대표를 선발해 입법위원회를 구성했고,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기 위해 《교서》를 발간했다. 황제는 자신의 개혁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계몽사상가의 조언을 구할 기회를 엿보았으며, 그 방편으로 서한 교환을 적극 활용했다. 서한집 곳곳에는 러시아의 개혁을 구상하는 황제의 굳은 결의가 잘 드러난다. 예카테리나 2세는 서구화를 진전시켜 러시아 제국의 정치 및 경제 구조를 재편했으며, 이러한 개혁은 그를 계몽 군주의 반열에 올렸다.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가 ‘야만과 무지’에 대항해 ‘문명’의 승리를 홀로 이끄는 국가라는 명성을 얻게 하려 애썼다. 그가 ‘야만과 무지’로 수식한 제국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의 기세를 세계에 알리며 유럽 외교의 막강한 권력자로 떠올랐다.

절대 군주의 권위와 계몽 군주의 매력을 아울러 갖춘
황제의 독특한 서한 정치

18세기는 살롱에서의 사교 활동이 중요했던 계몽의 시대였다. 지식인과 정치권력은 살롱에서 만나 서로에게 이득을 취했다. 이들은 사상을 주고받는 도구로 편지를 활용했으며, 편지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본 시장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편지는 단지 사적인 소통 매체가 아니었고, 사교뿐 아니라 국가 통치에도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를 문화적, 군사적으로 유럽 문명의 중심부에 편입시키기 위해 절대 군주의 권위와 계몽 군주의 매력을 아울러 갖춘 서한 정치를 시도했다. 무력으로 황위를 차지한 예카테리나 2세는 적통을 물려받은 군주가 아니었으며, 여성이기까지 했으므로 입지가 더 취약했다. 그가 통치해야 하는 영토는 광활했고 주민들의 문화는 너무도 다양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와 독일 지식인의 사상을 차용하여 자연법과 공공의 복지에 기초한 정당화를 시도했다. 예카테리나는 서유럽의 최신 연구를 습득하고 뛰어난 학자들과 서한을 주고받으며 개혁을 구상해갔다.

편지의 세기, 문인공화국의 황제와 시인

예카테리나 2세는 18세기 유럽이라는 ‘문인공화국(문필공화국)’의 일원으로서 프랑스의 여러 지식인들과 편지를 활발히 주고받았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단연 볼테르였다. 볼테르는 “프랑스 서사시의 호메로스”이자 “계몽의 대표 주자, 베르사유 궁전의 공식 역사가, 철학적 세계사의 저자, 산문의 대가, 출판 업계의 권력자, 관용의 투사, (…) 무엇보다 서한 교환의 제왕”이었다.(238쪽, 옮긴이 해제) 볼테르의 재능에 매료된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의 뜻을 펼치는 데 그의 영향력을 활용하고자 했으며, 즉위한 이듬해 1763년부터 볼테르가 사망한 1778년까지 프랑스어로 서한을 주고받았다. 볼테르는 예카테리나 2세의 전쟁을 지지하며 유럽의 여론을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했고, 황제가 강력하면서도 계몽되고 관용을 베푸는 군주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에게 있어 황제의 서한은 “최선을 다하는 통치자의 글이면서 위안을 구하는 제자의 글”이었다. 볼테르에게 보낸 예카테리나 2세의 편지는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러시아가 어떻게 유럽이라는 타자를 의식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개혁을 이끌어나갔는지 보여준다.


차례

1762년 11월 13일, 모스크바, 장 르 롱 달랑베르에게
[1763년 9월], 볼테르에게
1763년 9월 27일 (구력), 상트페테르부르크, 프리드리히 2세에게
1765년 3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리테레즈 로데 조프랭에게
1765년 6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리테레즈 로데 조프랭에게
1765년 8월 22일, 볼테르에게
1765년 11월 21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장 르 롱 달랑베르에게
1765년 11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66년 7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66년 8월 31일, 장 르 롱 달랑베르에게
1767년 1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67년 3월 26일, 모스크바, 볼테르에게
1767년 5월 29일, 카잔, 볼테르에게
1767년 10월 12일, 모스크바,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에게
[1767년 12월 22일], 볼테르에게
1768년 12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69년 4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69년 7월 14일, 페테르고프, 볼테르에게
1769년 9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69년 11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70년 1월 19일, 볼테르에게
1770년 3월 31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70년 6월 6일, 차르스코예 셀로의 별장, 볼테르에게
1770년 8월 9일 / 8월 20일, 볼테르에게
1770년 9월 16일 / 9월 27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70년 11월], 볼테르에게

1770년 12월 4일 / 12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71년 3월 14일 / 3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71년 3월 7일 / 3월 26일, 볼테르에게
1771년 5월 20일 / 5월 31일, 볼테르에게
1771년 7월 22일 / 8월 3일, 볼테르에게
1771년 9월 4일 / 9월 15일, 볼테르에게
1771년 10월 6일 / 10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71년 11월 28일 / 12월 9일, 볼테르에게
1772년 1월 30일 / 2월 1일, 볼테르에게
1772년 3월 30일, 볼테르에게
1772년 4월 3일 (구력), 볼테르에게
1772년 7월 6일, 페테르고프, 볼테르에게
1772년 10월 3일, 볼테르에게
1772년 11월 22일, 볼테르에게
1772년 말 / 1773년 초, 장 르 롱 달랑베르에게
1773년 3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볼테르에게
1774년 1월 7일, 볼테르에게
1774년 3월 15일, 볼테르에게
1774년 11월 2일, 볼테르에게
[1775년 11월], 볼테르에게
1763년 2월 4일, 페르네 성, 볼테르가 장 르 롱 달랑베르에게

옮긴이 해제 ・ 18세기 러시아와 예카테리나 대제
옮긴이 해제 ・ 계몽의 시대, 황제의 편지
연보


책 속에서

군주는 포상받을 권리가 있는 발군의 사상가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허락되지 않아요. 군주는 사람들의 재능을 장려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군주는 아무런 재능이 없다는 의심을 받을 겁니다.

44쪽, 1765년 11월 21일, 장 르 롱 달랑베르에게

새 법제는 풍토, 민족, 습관, 심지어 관념조차 너무나 다른 아시아와 유럽에서 작동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아시아에 있는 것은 내 눈으로 직접 이 땅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 도시에는 서로 전혀 닮은 점이 없는 20개의 다양한 민족이 있고 나는 이들 모두에게 맞는 옷을 제작해야 해요. (…)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통합하고 보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예요. 하염없이 계속할 수 있겠으나 여하간 해야 할 일이 이미 너무도 많습니다. 

62쪽, 1767년 5월 29일, 볼테르에게

나는 국민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합니다. 러시아 국민은 좋은 씨앗이 빠르게 싹트는 탁월한 토양이나, 우리는 자명한 진실로 인정되는 격률이 필요해요.

70쪽, [1767년 12월 22일], 볼테르에게

러시아가 전쟁 중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 일을 꽤 오랫동안 해왔고, 매번 전쟁을 개시할 때보다 [끝낼 때] 더욱 번영해져 있습니다. 우리의 법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요. 점차 손을 보고 있습니다. 법이 부차적인 사안이 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법은 관용적일 거예요. 법은 누구도 박해하지 않고, 사형하지 않으며, 화형당하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84~85쪽, 1769년 7월 14일, 볼테르에게

혼자 되뇌었어요. 러시아는 이 전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러시아가 용감한 불굴의 민족이고, 러시아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영웅을 이루는 자질을 모두 갖춘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러시아에 자원이 부족하지 않으며, 러시아가 자원을 소모하지 않았고, 그보다는 부당하게 공격을 당했을 때 스스로를 방어하고 높은 기세로 수월하게 전쟁에 임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일이 잘 되고 있지 않다면, 나는 내 능력을 모두 동원해 가능한 한 최선의 경로에 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야망이고, 그 외의 것은 없어요.

140쪽, 1771년 7월 22일 / 8월 3일, 볼테르에게〉

나는 정말 러시아가 비잔티움을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평화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전쟁보다 낫다고 말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스타파 경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는 전자와 후자 양쪽에 준비가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당신에게 러시아가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말해도 단 한 마디도 믿지 말아요. 우리는 다른 열강이 평화 상태일 때 소진했을 1,000개의 자원을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어떠한 세금도 신설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필요한 것이 전부 충분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160쪽, 1772년 3월 30일, 볼테르에게

황제는 “신이시여!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셔서 당신의 인민을 성스러운 법과 정의로 심판할 수 있도록 제게 지성을 주십시오”라는 외침으로 《교서》를 시작한다. 예카테리나는 《교서》 1장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이 모든 민중의 가슴속에 뿌리내려 민중이 조국의 번영, 명예, 행복, 평화를 소망하고 계율에 반하는 모든 시도로부터 법의 보호를 받기를 희망할 것이라고 적었다. 황제는 이를 위해 러시아의 자연환경과 인민의 습속 및 기질에 어울리는 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카테리나는 신앙, 자연조건, 지리적 조건을 법의 토대로 간주하고, 그 셋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통치의 원리로 삼고자 했다.

230쪽, 옮긴이 해제 · 18세기 러시아와 예카테리나 대제

예카테리나는 러시아를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유럽 문명의 중심부에 편입시키고 표트르 대제 이후 최고의 황제로 군림하기 위해 절대 군주의 권위와 계몽 군주의 매력을 겸비한 독특한 서한 정치를 시도했다. 그녀의 이런 시도가 러시아의 광개토대왕이라 불릴 만한 황제의 업적에 어느 정도로 기여했는지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황위에 대한 존경, 애정, 두려움을 동시에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240쪽, 옮긴이 해제 · 계몽의 시대, 황제의 편지

지은이 |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 II Алексеевна)

18세기 러시아의 대제이자 계몽 군주. 본명은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 폰 안할트체르프스트(Sophie Auguste Friederike von Anhalt-Zerbst)로 1729년 4월 21일 프로이센의 소공국 슈테틴에서 태어났다. 1744년 겨울, 조피는 러시아에 도착하는데, 러시아 황제 옐리자베타가 자신의 후계자로 정한 미래의 표트르 3세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정교회로 개종한 조피는 예카테리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얻는다. 옐리자베타 황제가 사망하고 표트르 3세가 즉위한 지 6개월이 흐른 1762년 6월,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황제 자리에 오른다. 예카테리나가 통치하는 동안 러시아는 유럽 열강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으며 러시아의 문화도 활짝 피었다. 예카테리나는 유럽의 문인과 서한을 교환하며 자신의 개혁을 알리고 조언을 구하며 문인공화국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18세기 러시아의 한 시인은 “표트르는 우리에게 존재를 주었고 예카테리나는 영혼을 주었다”라고 노래했다. 1796년 11월 6일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옮긴이 | 김민철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프랑스혁명사와 지성사를 연구한다.

옮긴이 | 이승은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제정러시아사와 지성사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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