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레이샹린
  • 옮긴이 박승만·김찬현·오윤근
  • 발행일 2021년 2월 5일
  • 판형 152×223mm
  • 면수 364쪽
  • 정가 20,000원
  • ISBN 9791189433222
  • 전자책 미출간


책 소개

“중국의학의 근대사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 답이다.”
근대성의 안티테제에서 중국 고유의 근대성을 표상하는
유력한 상징으로 거듭난 중국의학의 파란만장한 역사

중국의학의 근대사를 정확히 짚어낸 단 한 권의 책
존스홉킨스대학교 마타 핸슨 교수, 시드니대학교 워릭 앤더슨 교수 추천

중국의학의 근대사에 관한 책을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이 답이다. 레이샹린의 의학, 과학, 근대, 그리고 국가에 대한 분석은 눈부시게 독창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며, 논증은 감탄할 정도로 명료하다. 이 책은 20세기 중국 연구뿐 아니라 과학연구와 세계 보건 역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하버드대학교 구리야마 시게히사 교수

읻다의 의학서 시리즈 ‘척도와 구성’의 첫 번째 책으로 《비려비마: 중국의 근대성과 의학》이 출간되었다. 중국의학사를 연구한 레이샹린의 저작인 이 책은 20세기 초반 중국의학의 역사를 살핌으로써 중국의학 고유의 근대성, 더 나아가 중국 고유의 근대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세계의 전통 의료 대부분이 소멸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난 것과 달리, 중국의학은 독특하게도 과학과 근대성의 공격을 견뎌내고 국가의 공인을 받은 지식이 되었다. 중국의 모든 과학 분야를 통틀어 “1850년에서 1920년까지 가해진 근대 과학의 충격에서 살아남은”(벤저민 엘먼) 전통 학문은 중국의학이 유일하다. 이제 중국의학은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보완대체의학의 중요한 흐름으로 인정받고 있을 뿐 아니라, 각국의 의료 서비스에도 편입되고 있다. 저자인 레이샹린은 중국의학의 근대사가 중국이 근대성을 탐색해나가는 과정의 핵심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의학사 서술은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을 대립시킴으로써 중국의학을 중국의 의학적 근대성으로부터 배제해왔다. 여러 역사학자는 근대적 제도와 가치, 지식이 중국의학의 궤적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했지만, 중국의학이 서양의학의 도입, 공중보건과 의료 행정의 구성 과정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샹린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의학의 독특함은 바로 중국의 근대성과 얽힌 치열하고도 모호한 관계에서 비롯한다.

“나귀도 아니고 말도 아닌 잡종 의학”
새로운 중국의학의 탄생을 위한 세 겹의 싸움

1920년대까지만 해도 근대성의 안티테제로 여겨졌던 중국의학은 반 세기 후 어떻게 중국 고유의 근대성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 되었을까? 이 문제의 열쇠는 ‘비려비마(非驢非馬)’라는 이 책의 제목에 있다. 요컨대 역사적 전환의 핵심은 ‘나귀도 아니고 말도 아닌’ 새로운 ‘종(種)’의 중국의학이 등장했다는 데 있다. ‘비려비마’는 사실 경멸조로 쓰이는 관용구이다. 근대 중국의학을 향한 이 말은 나귀와 말의 잡종인 노새, 즉 서양의학도 중국의학도 아닌 ‘잡종의학’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한편으로 근대 중국의학이 서양의학은 물론 그때까지의 전통과도 구분되는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과정은 세 겹의 싸움이었다. 근대 중국의학은 서양의학 그리고 민족주의 국가와 공존하며 제도적·인식적·물질적으로 변혁을 거치면서 탄생했다. 

첫째, 제도적 변혁이다. 중의는 국가와 의학이라는 관계 속에서 서의와 겨루어야 했다. 새로이 등장한 근대 국가와 의학의 접합 속에서 서의와 중의는 국가 보건 행정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쟁했다. 둘째, 인식적 변혁이다. 서의들은 중국의학에 세균 이론이 존재하지 않으며, 병인(病因)을 파악하지 못하기에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세균 이론을 수용할 것인가, 기존의 모습을 고수할 것인가. 중대한 기로에 놓인 중의들은 ‘변증론치(辨證論治)’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셋째, 물질적 변혁이다. 중의는 서의의 공격에 맞서 중약(中藥)의 유효성을 지켜내야 했다. 서의들은 정제되지 않은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달여 먹는 중약이 유효한 성분만을 분리해 투여하는 서양의학을 따라올 수 없다고 공격했다. 이에 중의는 약물을 연구하는 새로운 방식인 ‘역순 연구 절차’를 제시함으로써 딜레마를 벗어나려 했다.

‘대문자 근대성’이 아닌 ‘소문자 근대성’에 대한 탐구
한의학은 어떠한 형태의 근대성을 보여주는가

새로운 중국의학의 모습을 통해 레이샹린은 근대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유럽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보편으로 추켜세우고 비서구 세계를 여기에 맞추어 재단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레이샹린은 자신만의 근대성을 형성해낸 중국의학의 예를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근대성, ‘혼종적 근대’의 일례를 제시한다. 이는 ‘소문자 근대성’의 사례를 탐구함으로써 ‘대문자 근대성’을 향한 대항을 시도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사례는 어떠한가. 대개 한의학은 과거의 전통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한의사와 서양 의사 양측이 만들어낸 신화에 가깝다. 실제로 한의학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서양의학이라는 새로운 대상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다듬어야 했다. 한의학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어떻게 변화했는가? 한의학을 ‘전근대’로 규정하는 시선은 정당한가? 한의학은 어떠한 형태의 근대성을 보여주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더불어 한의사 및 서양 의사, 의학사 연구자, 넓게는 근대성을 탐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흥미롭고 독창적인 통찰을 제시할 것이다.


척도와 구성

생물에 대한 연구를 가장 근본적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감각기관을 확장하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따른 결과라기보다 새로운 대상에 대한 분석에 접근하면서입니다. 오히려 유기체를 바라보는 방식, 유기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 관찰이 답해야 하는 질문을 정식화하는 방식이 변화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단순한 관점의 변화가 장애물을 제거하고, 대상의 어떤 모호한 면,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어떤 관계를 드러냅니다.

프랑수아 자콥, 《생물의 논리》 중

생명과 신체를 이해하는 분석은 우리가 가진 척도로 관찰 대상을 가늠하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보다 정확하고 세밀한 측정이 가능해지면서 우리는 유기체를 이루는 부분 및 다양한 기관에 대한 명확한 분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척도와 구성’은 이러한 관찰과 이해를 통해 부분과 전체에 대한 관계, 하나의 전체로서 생명체에 대한 해석, 하나의 유기체가 환경과 맺는 다양한 관점을 소개합니다.


차례

1장 서론
1. 1. 중국의학과 근대국가의 조우
1. 2.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을 넘어
1. 3. 공진화적 역사를 향하여
1. 4. 중국의 근대성
1. 5. 근대성 담론
1. 6. 비려비마
1. 7. 용어들

2장 주권과 현미경: 1910~1911년 만주 페스트 방역
2. 1. “페스트는 전염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믿지 못하겠소”
2. 2. 폐페스트 대 선페스트
2. 3. 4,000년 동안 가장 잔혹했던 경찰
2. 4. 중국의학의 도전: 홍콩과 만주
2. 5. 추안란: 감염자 간의 연결망과 그 확장
2. 6. 유행병을 피해서
2. 7. 국제감시체계의 일원이 되다
2. 8. 결론: 만주 페스트의 사회적 특성

3장 의료와 국가 연결하기: 1860~1928년 선교의료에서 공중보건으로
3. 1. 선교의료
3. 2. 서양의학의 지위: 청말과 메이지 일본
3. 3. 1세대 서의의 등장
3. 4. 공공사업으로서의 서양의학
3. 5. “공중보건: 대규모 사업을 벌이기에 아직은 때가 이르다”, 1914~1924
3. 6. 위생부와 ‘근대 정부의 의료에 대한 의무’, 1926~1927
3. 7. 결론

4장 중국의학과 서양의학의 관계를 상상하다, 1890~1928
4. 1. 1890년대 말 중국의학과 서양의학의 회통
4. 2. 경맥과 혈관의 불통
4. 3. 위옌과 셋으로 나누어진 중국의학
4. 4. 대결 장소를 피해서
4. 5. 에페드린과 ‘국산 약물의 과학 연구’
4. 6. 중국의학에서 경험 전통을 만들어내기
4. 7. 결론

5장 중국의학 혁명과 국의운동
5. 1. 중국의학 혁명
5. 2. 중의학교의 합법화를 둘러싼 논란
5. 3. 중국의학의 폐지: 1929년의 제안
5. 4. 3월 17일의 시위
5. 5. ‘국의’의 양면적 의미
5. 6. 난징에 파견된 중의 대표단
5. 7. ‘국의’의 상을 그리다
5. 8. 결론

6장 1930년대 상하이 보건의료의 시각화
6. 1. 상하이의 의료 환경에 대한 도해를 읽다
6. 2. 서양의학: 통합과 경계 긋기
6. 3. 중국의학: 분열과 파편화
6. 4. 중국의학의 체계화
6. 5. 결론

7장 동사로서의 과학: 중국의학의 과학화와 잡종의학의 부상
7. 1. 국의관
7. 2. 중국 과학화 운동
7. 3. 중국의학의 과학화를 둘러싼 논쟁: 세 가지 입장
7. 4. 기화를 버리고 과학화를 택하다
7. 5. 과학화를 거부하다
7. 6. 중국의학의 재조립: 침구와 축유
7. 7. ‘잡종의학’의 도전
7. 8. 결론

8장 세균 이론과 ‘변증론치’의 전사
8. 1. 감염병의 존재를 알아보시겠소?
8. 2. 신고 대상 감염병
8. 3. 질병 분류의 통일과 장티푸스의 번역
8. 4. 중국의학에 세균 이론을 녹여 넣기
8. 5. 병증 대 질병
8. 6. ‘변증론치’의 전사
8. 7. 결론

9장 정치 전략으로서의 연구 설계: 항말라리아제 신약 상산의 탄생
9. 1. 상산 연구라는 이례적 사례
9. 2. 국산 약물의 과학 연구
9. 3. 1단계: 문턱을 넘기
9. 4. 추씨 부인의 치험례
9. 5. 2단계: 상산의 새로운 연결망
9. 6. 상산의 정체를 확인하다
9. 7. 두 가지 연구 절차: 1 -2 -3 -4 -5 대 5 -4 -3 -2 -1
9. 8. 역순 연구 절차: 5 -4 -3 -2 -1
9. 9. 정치 전략으로서의 연구 절차
9. 10. 결론: 지식 정치와 가치 체제

10장 국가의료와 중국 향촌, 1929~1949
10. 1. 중국 의료의 문제를 정의하다
10. 2. 중국 향촌을 발견하다
10. 3. 딩현의 공동체 의료 모형
10. 4. 국가의료와 중화의학회
10. 5. 국가의료와 지방자치정부
10. 6. 보건원 제도의 폐지 문제
10. 7. 향촌을 위한 중국의학

11장 결론: 근대 중국의학을 생각하다
11. 1. 의학과 국가
11. 2. 가치의 창조
11. 3. 의학과 중국의 근대성: 국민당과 공산당
11. 4. 중국의학과 과학기술학

감사의 글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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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중국의학의 생존’과 ‘근대 의학의 발전’이라는 이원화된 역사관을 넘어서기 위해, 나는 중국의학과 서양의학, 그리고 국가 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했다. 그리고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상호작용을 드러내기 위해 서로 무관하다고 여겨졌던 세 갈래의 역사, 즉 중국 서양의학의 역사, 중국의학의 역사, 그리고 국가의 정치사를 하나로 통합했다. 나는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 세 갈래의 역사를 공정하게 다룰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상이한 범주에 속하며, 따라서 실질적으로 동떨어졌으리라 간주되던 여러 역사적 실체 간의 놀라운 동맹 관계를 밝혀낼 수 있었다.

17쪽

중국의학은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며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새로운 생각과 인공물, 사람, 제도를 마주했다. 앞으로 다룰 몇 가지를 예로 들면 현미경, 증기기관,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 세균 이론, 근대적 병원, 사회 조사, 위생부, 록펠러 재단, 전문가주의 등이다. 중의들은 이와 같은 근대 세계의 여러 측면 앞에서 충격을 받거나 위협을 느꼈고, 때로는 매혹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근대성 담론’보다 근대 중국의학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근대국가뿐이었다. 근대성 담론은 중국의학과 과학을 화해 불가능한 대립물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이로써 중국의학을 옹호하거나 개혁하려던 이들에게 힘겨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23쪽

영어에는 이런 표현이 없으므로 비려비마라는 말의 기원과 의미를 먼저 설명하는 편이 유용할 것이다. 이는 2,000년 전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서 처음 쓰인 문구이다. 오늘날의 신장 지역에는 구자국龜玆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곳의 왕은 한나라의 문화를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신하들에게 한나라풍으로 궁궐을 짓고, 한나라풍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한나라풍의 의례와 제도를 도입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구자국의 사람들은 “나귀처럼 보여도 나귀가 아니고, 말처럼 보여도 말이 아니니, 구자국의 왕은 그저 노새일 뿐”이라며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처럼 여기에는 왕이 한나라와 구자국 모두의 문화적 전통을 배반했다는 뜻이 담겨 있고, 그런 의미에서 비려비마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문화적 통합에 대한 강한 반감을 담아내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25쪽

거즈 마스크를 둘러싼 갈등은 외국인 의사들이 폐페스트와 선페스트가 구분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거부감을 보였는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이다. 호흡기를 통한 직접 감염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롄더는 위생국 직원들과 일반 대중 모두에게 자신이 고안한 거즈 마스크를 권했다. 그러나 선페스트에 대한 최신의 지식을 굳건히 신뢰하던 일본, 러시아, 프랑스 출신의 의사들은 우롄더의 분석을 믿지 않았고, 중증의 페스트 환자를 지근거리에서 대할 때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우롄더가 회고하길 그가 소속된 페스트 방역반의 선임이자 베이양의학당北洋醫學堂의 주임교수였던 프랑스 의사 제랄드 메스니Gérald Mesny, 1869~1911 역시 우롄더의 발견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고, 우롄더는 분을 참지 못하여 청 조정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며칠 후 메스니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러시아의 피병원避病院을 방문했다가 페스트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6일이 지난 후, 페스트 방역반의 상징과도 같았던 메스니는 사망하고 말았다. 만주는 곧 공황 상태에 빠졌다. 사람들은 이제야 만주 페스트의 위험성을 인지했다. 

33-34쪽

중국 사람들은 보통 중국어 ‘과학화하다科學化’를 서양 단어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영어 ‘scientize’는 사실 제대로 된 단어가 아니다. 워드프로세서에 ‘scientize’를 입력해보라. 맞춤법 검사기는 모조리 빨간 밑줄을 그어댈 것이다. 컴퓨터가 틀린 것 같다면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찾아보라. ‘scientize’가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나오는 몇 안 되는 인용문에서조차 따옴표에 둘러싸인 경우가 태반이다. ‘과학화하다’라는 말은 분명 과학이라는 개념에서 자연스럽게 바로 도출된 단어처럼 보이지만, 근대 과학의 개념을 함께 벼려낸 유럽의 국가들은 ‘과학’을 동사로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극명히 대조적으로 현대의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는 ‘과학화하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는데 말이다. 따라서 중국인이나 일본인, 한국인이라면 서양인이 ‘과학화하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과학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의아할 수 있다.

143쪽

1920년대 중국의학을 둘러싼 여러 근대화 담론 가운데 중국의학을 옹호하던 이들이 별달리 저항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중약이 자연 원료인 ‘초근목피草根樹皮’, 즉 풀뿌리와 나무껍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 이는 중국의학을 원시적이라 폄하하는 표현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릇된 이론에 의해 퇴색되지 않은 값진 요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국의학이 단지 중국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웃음거리’로 취급되던 시절, 중국의학을 깔보는 표현을 중국의학이 완전히 무가치하지는 않다는 뜻으로 전유한 것이다.

193쪽

정치적 전략과 학문적 혁신의 ‘불가분의 이중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비려비마’로 정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표현은 이 책의 서두에서 제기된 문제의 열쇠를 제공한다. 중국의학은 어떻게 근대성에 대한 안티테제에서 중국 고유의 근대성을 표상하는 유력한 상징으로 거듭나게 되었는가. 나는 이러한 이행이 근대 중국의 정치사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대신, 나름의 흐름을 지닌 중국의학의 역사가 근대성과 국가의 정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념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중국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비려비마’라는 멸칭이 붙은 새로운 의학의 발흥이었다. 새로운 의학이 어렵게 얻어낸 성취는 중국의학이 근대성의 안티테제가 아닐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257쪽


지은이 | 레이샹린(雷祥麟, Sean Hsiang-Lin Lei)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와 국립양밍대학 과학기술학연구소에서 근대 중국 의학사와 과학사를 연구하고 있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화학과 과학사를 공부했다. 전통 의학과 공중보건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했으며, 최근에는 중국의학에서 임상 연구가 등장한 역사적 궤적을 탐구하고 있다. 《비려비마: 중국의 근대성과 의학》을 비롯하여 다수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옮긴이 | 박승만

학부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의학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에서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의학 지식이 생성되고, 작동하며, 정당화되는 과정을 역사를 통해 살피려 한다.

옮긴이 | 김찬현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반수소 원자의 합성을 연구했다. 반도체 소자 엔지니어를 거쳐 과학기술 시민단체 ESC의 부대표로 활동 중이다. 시민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 및 과학기술정책 형성에 관심이 많다.

옮긴이 | 오윤근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근대 정치사상을 공부했다.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고 있다. 근대국가, 헌법, 민주주의를 결합하려는 노력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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