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미즈노 루리코
  • 옮긴이 정수윤
  • 원제 ヘンゼルとグレ-テルの島
  • 발행일 2022년 5월 13일
  • 판형 115×190mm
  • 면수 136쪽
  • 정가 12,000원
  • ISBN 9791189433499
  • 전자책 epub

책 소개

“우리의 작고 어린 섬에 대하여”
우주의 느릿한 음색의 고리로 이어지는 세계, 
시인 미즈노 루리코의 H씨상 수상작  

읻다 시인선 13권. 일본의 시인 미즈노 루리코를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한 시집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되었다. 미즈노 루리코는 1932년 도쿄 오모리에서 태어났다. 그로부터 7년 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의 유년은 공습과 배고픔, 두려움으로 채워졌다. 쉰의 문턱에서 시인은 어린 날 목도했던 공포를 신비로운 한 편의 시 〈헨젤과 그레텔의 섬〉으로 승화시켰다. 1983년에는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한 시집 《헨젤과 그레텔의 섬》을 출간하고 일본 권위의 시 문학상인 ‘H씨상’을 수상했다. 이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다수의 시집을 남겼다.  

시를 막 쓰기 시작했을 때는, 오롯이 나만의 사상이나 관념을 획득하지 못하면 시를 쓸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쓰는 행위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겠지요. 《헨젤과 그레텔의 섬》을 쓰면서, 저는 제게 적합한 시의 문체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한국어판 서문

시인은 2022년 1월, 90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여 쓴 서문에 그는 《헨젤과 그레텔의 섬》을 쓰며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해방감을 얻은 것 같다고 적었다. 꿈속에서 연이어 떠오르는 선명한 혼돈의 이미지를 무구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미즈노 루리코의 언어로 우리가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섬을 만나보자.

상처와 슬픔, 그 원형적 기억에 대해

내 안에 잠들어 있는 한 아이가 눈을 뜬다. 

시인의 말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다 해도 사람들의 내면 세계에서는 쉽게 끝이 나지 않는다. 시인 안에 잠들어 있던 한 아이는 눈을 뜨고 색채와 소리와 냄새로 가득한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불안을 견딜 수 없어 걸핏하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는 어둠의 귀퉁이로 달아나 숨어”버렸다. 《헨젤과 그레텔의 섬》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섬은 시인의 의식 깊은 곳에서 떠오른 어린 시절의 섬이다. 폭력과 기근으로 둘러싸인 숲에 남겨진 남매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함께 길을 잃게 될 것이다. 그 지점에서 숲의 정경을 둘러보면 미즈노 루리코가 쌓아 올린 판타지의 성을 마주하게 된다.     

깊은 숲속에서 양치식물의 포자가 금빛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부뚜막 안에서 마녀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이의 호주머니에 더는 빵 부스러기나 조약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여름의 끝에 그이는 죽었다  그것은 작고 투명한 유리잔 같은 여름이었다  그런 여름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르는 듯했다 

〈헨젤과 그레텔의 섬〉 중에서

우리의 손이 우리도 모르게 그려나간 그 생명체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무의 집 내부는 그들의 가쁜 숨소리로 가득하다  그들을 빛 속으로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는  단 한 줄의 선  단 하나의 점을 더하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겐 그만한 시간이 없다   

〈나무의 집〉 중에서

코끼리, 도마뱀, 새, 물고기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주체들은 생명으로서 동등한 무게와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한데 모여 만드는 유토피아와도 같은 풍경 은 우리가 오래 전에 잊은 한 시절의 정서에 가닿게 만든다. 미즈노 루리코가 상연하는 동화적인 시 세계는 개인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번역도 통역도 할 수 없는 침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린 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슬픔과 공포, 막연한 두려움이 거기에 있다. 여름의 따갑고 투명한 태양빛 아래 비극은 더욱 선명하고 고요한 섬에선 망가진 오르간 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진다. 

미즈노 루리코와의 만남을 기억하며

정수윤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대지에 열매를 맺으며, 창공으로 뻗어나가는 나무와 같이, 하늘과 땅을 잇는 우주적이고 자연적인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 결국 우리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나무에서 책으로, 책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다시 자연으로의 순환을 생각하게 하는 이 한 권의 시집은, 가늠하기 어려운 우주적 거리를 넘어 오늘의 당신에게 왔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우리는 “느릿한 나선형 음계를 타고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무한히 흘러”가는 미즈노 루리코의 섬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 나는 곧바로 번역 작업에 몰두했다. 덤으로 시인과 숱한 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즐거움 속에서 지난 계절들을 보냈다. 이렇게 이 책은 태어났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시인과 내가 만나기까지의 우주적 거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와 번역가 사이의 거리도, 책과 독자 사이의 거리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연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한 만남이 교차하는지 생각해 보면, 달과 지구가 만나는 일만큼이나 신비롭고 즐거운 일이 아닐까 싶다.

2016년 역자 인터뷰 중에서

차례

한국어판 서문


헨젤과 그레텔의 섬
도라의 섬
모아가 있던 하늘
코끼리 나무 섬에서
나무의 집


등대
시간 1
시간 2
그림자
언덕
그림자 새

물고기

물고기의 밤
회색빛 나무



봄의 모자이크

분주한 밤
그림자 샐러드
말과 물고기

시인의 말

옮긴이의 말 


책 속에서

외로운 섬은 그 후 코끼리의 형상으로 고요히 우리를 기다려온 것이다 하늘과 반짝이는 양치식물이 있는 숲 그늘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하여

19쪽, 〈헨젤과 그레텔의 섬〉

깊은 숲속에서 양치식물의 포자가 금빛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부뚜막 안에서 마녀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이의 호주머니에 더는 빵 부스러기나 조약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여름의 끝에 그이는 죽었다 그것은 작고 투명한 유리잔 같은 여름이었다 그런 여름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르는 듯했다

21쪽, 〈헨젤과 그레텔의 섬〉 중에서

벽 위에 작은 별처럼 남겨진 여러 개의 얼룩들이 점점이 박힌 그것들을 이어봐 어린 날 우리가 밤마다 그리던 이상한 동물들이 거기 있잖아

47쪽, 〈나무의 집〉

오빠는 말했다  도라는 세계의 미숙한 원형이란다  코끼리에서 새에게로  새에서 도마뱀에게로  도마뱀에서 조개에게로  조개에서 인간에게로  끊임없이 전송되는 나선형 음계가 보인다  도라에게서 발신되어  무한히 이어지는 녹색 모음 계열은 다시금 도라의 귀로 되돌아가고  도라는 듣고 있다  우리 안의 ‘ㅏ’를 수런거리게하고  표표히 떠도는 우리의 ‘ㅣ’를 끌어들여  느릿한 모음의 리듬이 구형의 하늘을 맴도는 것이다

23~25쪽, 〈도라의 섬〉 중에서

어린 날에는 창을 열면 하늘의 내부가 보였다 하늘 밑바닥에는 멸종된 모아들의 뼈가 별처럼 포개져 있었다 새벽과 초저녁이 분주하게 교차하며 예민한 낮별들이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작게 회전하며 보이지 않는 새들의 궤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33쪽, 〈모아가 있던 하늘〉 중에서

아무리 드넓은 바다에 잠겨도 젖는 일이 없었는데 물방울 하나에는 빠질 수가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태양을 향해 날자 온몸에서 오렌지색 향기가 났다 바닷속 코끼리 같고 하늘 위 고래 같은 그 이름을 불러본 이는 아직 없었다 오직 한 번뿐인 오직 한 마리의 생명체였다 그 생명체는 만약 천 일의 태양빛이 있다고 한다면 천 번에 또 한 번을 더한 만큼의 호흡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뜨거운 세기였다

37~39쪽, 〈코끼리 나무 섬에서〉 중에서

아이들이 알 속에서 꿈을 꿉니다 아이들의 엷은 눈썹과 입이 있는 곳은 멀리 나뭇가지와 구름에 겹쳐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알 속은 푸른 어둠입니다 아이들이 짧은 손과 발로 태어나는 연습을 반복합니다 어떤 아이는 뱀이 되어가고 어떤 아이는 물고기가 되어갑니다 아이들의 몸통은 이미 어둡습니다

111~113쪽, 〈알〉 중에서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 속에서 달팽이 한 마리가 기어 나옵니다 졸음 가득한 달팽이입니다 선홍색 더듬이를 움츠리고서 달의 언덕을 올라갑니다 아이가 종종 뒤따라갑니다 지의식물이 솨솨 푸른 홀씨를 날립니다 바람이 입니다 어머니가 창밖으로 손을 뻗어 보름달의 돛을 끌어 내립니다

117쪽, 〈분주한 밤〉 중에서

지은이 | 미즈노 루리코(水野るり子)

1932년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1964년 직장을 그만두고 지인들과 모임을 만들어 르네 기요의 《흰 말》 등 동화 번역을 시작했다. 1974년 샹송 콘서트 《동물도감》의 작사를 맡았으며, 1977년 첫 시집 《동물도감》을 출간했다. 1983년 두 번째 시집 《헨젤과 그레텔의 섬》을 발표, 이듬해 이 시집으로 H씨 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외에도 시집 《라푼젤의 말》, 《개암나무색 눈의 여동생》, 《고래의 귀이개》, 《유니콘이 오는 밤에》 등이 있다.


옮긴이 | 정수윤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근대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번역 시집으로 미야자와 겐지의 《봄과 아수라》, 이바라기 노리코의 《처음 가는 마을》, 사이하테 타히의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전 시 와카를 엮고 옮긴 산문집 《날마다 고독한 날》과 장편 동화 《모기소녀》가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