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자크 베르제
  • 옮긴이 문성욱
  • 원제 Hälfte des Lebens
  • 발행일 2024년 2월 28일
  • 판형 125×200mm
  • 면수 368쪽
  • 정가 20,000원
  • ISBN 9791193240342
  • 전자책 미출간

책 소개

‘앎’은 어떻게 근대국가를 탄생시켰나

‘공부’에 대한 오랜 탐색과 역사학적 고찰
식자의 등장, ‘학위’의 발명, 근대 대학의 시작점

프랑스의 중세 철학자 자크 베르제의 《공부하는 인간: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을 읻다에서 출간하였다. 자크 베르제는 대학을 중심으로 한 중세 교육제도를 평생토록 연구한 사람이다. 베르제의 오랜 연구 끝에 1997년에 발간된 이 책은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학위’ 제도와 그에 따른 교육 기관의 탄생을 다룬다.

책의 1부에서는 중세 말 서유럽에서 식자들을 정의하는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2부에서는 식자들이 능력에 따라 당시 사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을 수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나아가 이런 역할의 수행이 사회적·정치적 연속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3부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인가 상속자들인가”라는 주제 아래 중세 말 식자층의 등장을 비평한다.

과연 중세 말에 등장한 식자층은 당시 사회의 어떤 구성 요소였으며, 그 안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 이 책을 통해 알아가 보자.

중세 후기의 만화경, 식자

식자(識字)란 무엇인가? 《공부하는 인간: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에서 다루는 식자들은 특정한 유형의 교양을 소유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들이 지닌 교양은 어떤 형태인지, 그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위상을 누렸는지 소상히 다루었다.

식자는 지식을 기반으로 특정 업무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읽고 쓰는 능력뿐 아니라 책을 활용해 지식을 보존하거나 연구한다. 그리고 그 활동을 통해 사회적 위치를 갖고, 경제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면에서 《공부하는 인간》에서의 식자는 ‘지식인’과는 범주가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르 고프의 ‘지식인’이 어쨌거나 학교의 인간, 가르치고 배우는 인간이라면, 베르제의 ‘식자’는 학교 바깥에서 배움을 활용하는 이들, 배움을 밑천 삼아 교회나 국가나 도시에서 한자리를 얻어냈던 이들, 심지어는 풍월 수준의 학식으로 생계를 꾸린 초급학교 교사, 하급 관리, 공증인이나 외과술사 등 ‘매개적 지식인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들 없이 지식이 전파될 수 없고, 유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책의 부제에서도 드러나지만, 중세 말인 14~15세기는 종교·사회·정치적 측면에서 식자층이 중요하고 유효한 행위자가 될 만큼 그 인원수와 사회적 무게가 확보됐다. ‘근대국가’는 식자들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다. 이처럼 식자들은 ‘암흑시대’라 여겨진 중세의 풍경을 만화경처럼 다채롭고 다양하게 비추고 있다.

근대의 토대, 공부하는 인간
“배움은 단지 알기 위함이 아니라 내보이고 실천하기 위함이다”

이 책의 제1부에서는 중세 말 식자에게 요구된 지식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본다. 더불어 이들이 어떤 유형의 학교에서 어떤 책을 이용하여 교육을 받고, 사회적 규정에 핵심이 되는 앎에 숙달했는지도 알아볼 것이다.

중세 지식 문화에서 핵심이자 권위였던 라틴어에서 편리하고 이해하기 쉬운 당시 현지어의 부흥, 학문으로서 인정받게 된 의학, 법률가의 사회적·정치적 성공 등 중세 말 지식 문화는 목적성과 사회적 유용성을 모두 갖췄다.

대학의 통제 아래 새로운 형태의 학교들(초급학교, 학숙, 학당 등)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교육받은 식자들은 학업에 들인 시간과 비용으로부터 수익을 거두는 데 골몰하기도 했다. 그 안에서 식자들은 여러 임무를 수행했고, 안정적인 기득권 세력권 안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교육은 도제식 교육에서 직업 교육으로써 행해졌고, 현대 대학 모델의 기본 틀이 형성되었다.

더불어 경제 활동으로 비싼 책을 살 수 있게 된 식자층 덕에 ‘책을 소유하는 문화’가 발생했다. 후에 인쇄술의 책을 소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열렸다.

2부에서는 “중세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져보고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룬다. 인정받는 식자들의 능력이 무엇이었는지, 다변화하고 복잡한 사회 속에서 식자들에게 어떤 유형의, 어떤 수준의 사회적 직군의 길이 열렸는지 검토한 뒤 사회학적 현실의 문제로 옮겨간다.

국가의 성장으로 관직 수가 늘어나면서 식자의 증식이 촉진되었지만, 거기서 무슨 결론을 끌어내야 할까? 지방 사회의 가장 미미한 층위에까지 모세혈관을 탄 듯 지식 문화가 전파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학위가 평가 절하되었다는 것, 앞으로 침울한 여가밖에, 미래 없는 팔자라는 지식인의 빤한 도정밖에 누리지 못할 학위 취득자의 좌절감인가?

178p

식자들은 그저 전통적 범주인 성직자, 귀족, 시민 안에서 어떤 역할만을 수행했을까? 몇몇 식자는 통상적인 사법과 행정 업무 수행을 넘어서는 정치적 참여도 개시했다. 그들은 관리자와 조언자 역할을 하면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식자들 집단의 내적 연대, 즉 단결심 덕분이다.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식자층은 그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변화의 길을 틀어놓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3부에서 식자층은 새로운 계층인가, 아니면 기존 권력계를 새로이 세습하는 계층인지 논의한다.

다소간 깊이 학문 교과를 공부하느라 힘쓰고 또 이 수련 과정이 고생스러움을 숨기지 않는 이들은, 이런 유의 학업이 영예로운 것이자 사회·정치적으로 유용한 것임을 확신했고, 그로부터 최대한으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끌어내면서 친지들, 즉 빈번히 재정적으로 학업에 보탬을 준 이들도 득을 보게 하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특히 평범한 가족에서 아이 한 명에게 학업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모두가 사정이 허락하는 만큼 힘을 보태야 할 고된 사업이었을 테니 말이다.

260p

몽테뉴는 식자층, 법조인 등으로 이루어진 이 집단을 “제4신분”이라 말했다. 또 다른 별도의 집단의 탄생을 사회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들의 수는 꾸준히 늘어났고, 사회적 영향력도 증대했다. 하지만 그만큼 그들을 강하게 구속하는 교회와 정치에 맞서야 했고, 그들 안으로 점점 더 깊이 편입되었다. 식자층의 ‘정치화’는 인상적이면서도,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베르제는 말한다.

배움의 역사는 개혁의 역사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책의 한 장에 “지식과 권력”이라는 제목을 붙인 베르제는 권력자들의 압력뿐 아니라 식자들의 욕심도 놓치지 않는다. 현대처럼 이상과 현실이, 이데올로기와 이해득실이 뒤얽혀 있다. 중세의 중세인들도 그들 자신을 가리킬 때 “우리, 현대인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유럽과 중세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 문제의식들은 현재에도 계속된다.


차례

서문

제1부 · 교양의 토대
1장 · 지식
2장 · 학업
3장 · 책

제2부 · 능력 발휘
4장 · 신에게 봉사하기, 군주에게 봉사하기
5장 · 지식과 권력
6장 · 실무 세계

제3부 · 사회 현실과 자기 이미지
7장 · 새로운 사람들인가 상속자들인가?
8장 · 야심과 표상
9장 · 박사에서 인문주의자로: 연속과 혁신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색인


책 속에서

오늘날 우리 눈에는 신학자와 의사야말로 중세가 만들어낸 식자들 중 가장 독창적인 이들이지만, 지식 문화에 포함될 수 있는 온갖 구성 요소 중 단순히 숫자 면에서든 사회적 위상에서든 지배적인 교과가 법학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중세 말의 수 세기는 법률가의 황금기였고, 이 황금기는 여러 나라에서 구체제 말, 나아가 그 뒤까지 계속된다.

51쪽

앎에 매진하는 당사자의 구원뿐 아니라 그가 사는 사회를 위해 구체적으로 쓸모 있는 행동을 낳지 않는 앎이 무슨 소용인가? 당연히 그 대가로 식자는 자신의 사회적 유용성이 인정되고 정확한 가치에 따라 보상받기를, 다시 말해 자신이 엘리트층 안에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적어도 일신상 종신적인 지위를 얻어 자신이 귀족층 사이에 동화되기를 기대했다.

60쪽

특히 15세기에 일부 대학학숙 내부에서 자체적인 교육 과정이 발전했다는 사실은, 실상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마 경직되고 현실과 맞지 않는 대학 교육에 대한 불만을 입증할 것이다.

63쪽

최초의 대학은 13세기 초 볼로냐, 파리, 몽펠리에, 옥스퍼드에서 나타났다. 기존 학교(반드시 대성당 학교는 아니다)로부터 유래한 초기 대학은 제도가 제각기 다양했지만 조합적 성격을 띤 자율적 조직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87쪽

오히려 당시 문헌을 훑어보기만 하면 대학 학위 소지자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모든 문서에 점점 더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학위를 기재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중세 말 서구 사회에서 대학과 대학 출신자들이 점점 더 큰 사회·정치적 중요성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다수의 지표가 있다. 가장 명백한 첫째 지표는 14세기 중엽 이래 대학 설립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96쪽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사회적 출신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학생이 특정한 위험들을 피하게 해줄 안정적인 처지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정치권력 기관의 직간접적 세력권 안에 들어가고자 했다. (…) 전체적으로 중세 말의 학생이란 기성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지키는 데 주로 관심을 둔, 사회적으로 순응주의적인 인구 집단을 표상했다.

106쪽

식자는 말을 사용할 줄도 알았다. 문법을 배운 덕에 라틴어나 현지어를 가리지 않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논리학과 수사학 공부를 통해서는 올바른 추론과 설득력 있는 증명의 기예를 익혔다. 오랫동안 기억을 수련했기에 필기한 노트를 참고하지 않고서도 자기 지식의기초가 되는 “권위들(autorités)”의 숱한 인용구를 내세울 수도 있었다.

120쪽

식자는 근본적으로, 일단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책과 글의 인간이었으며, 바로 그것이 다른 모든 사회 집단과 비교해 볼 때 식자들의 가장 뚜렷한 특유성 중 하나였다. 따져보자면 결국 그들이 지식을, 그리하여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 자체에 대한 정당화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책으로부터였다. 그들만이 책을 읽을 수 있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책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집단이었다.

121쪽

우선, 식자가 신과 군주, 교회와 국가에 바치던 “봉사”란 정확히 어떤 성질의 것인가? 물론 그들에게 봉사했지만, 또 자기 이득을 위해 그들을 이용하지는 않았나? 비록 중세 식자들이 이론적 개념에 특별히 높은 값어치를 부여했고 관념의 힘을 가늠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 뛰어나기는 했다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특정 능력과 특정 직무의 결합만으로 정의되는 추상적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서 이들에게는 나름의 야심, 나름의 이해 관심, 나름의 교우 관계가 있는 것이다. 당시 사회에서 식자들의 역할에 대해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려면 이 모든 요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183쪽

사실 한낱 관리·조언자 역할을 맡으면서도, 군주 정책의 충실한 실행자를 자처하면서도, 식자들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식자들 집단의 내적 연대, 그들의 단결심 덕분이다. 또한 그들이 안정적·지속적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한 덕분이기도 한데, 이로 인해 몇 가지 변화 과정을 자기들의 생각에 맞으면서 가장 큰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틀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212쪽

식자들이 열망한 것은 자신의 학설에 맞게, 자기 자신의 이해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기성 질서에 더 잘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권력자에게 제기할 만한 비난은 주로 부당하거나 위험한 질서를 강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충분히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권력기관 안에 충분한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30쪽

그러니 박사 시대에서 인문주의자 시대로 넘어오는 동안 단절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기껏해야 근대화, 적응, 개방 정도인데, 그런 것 없이는 사회적 역동성도 없다. 우리 서구 사회가 추상적 지식에, 또한 그 지식의 보존과 전파를, 경우에 따라 실제 활용을 책임지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기꺼이 마련해 주던 자리는 이미 중세 말 수 세기 동안 그려진 것이었고, 이 그림은 아주 오랫동안 남을 것이었다.

311쪽

지은이 | 자크 베르제(Jacques Verger)

1770년 3월 20일 독일 서남부의 작은 마을 라우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친아버지와 의붓아버지를 모두 잃고 홀어머니의 소망에 따라 성직자 과정을 밟았다. 헤겔, 셸링과 동급생으로 튀빙겐 신학교를 마친 뒤 성직자의 길을 거부하고 시인의 길을 걸었다. 창작에 열중하는 한편, 성직 복무 의무를 피하며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독일의 여러 지역과 스위스, 프랑스를 전전하며 가정교사로 일했다. 1802년 봄 보르도를 떠나 10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서 귀향한 뒤 정신착란의 징후를 보였다. 1806년 튀빙겐의 아우텐리트 병원에 강제로 입원하고, 1807년 기껏해야 3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하여 오늘날 ‘횔덜린트름’이라 불리는 튀빙겐의 옥탑방에서 정신착란자로 36년을 살다가 1843년 6월 7일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는 동시대인인 괴테, 실러의 그늘에 가려 수수한 문명文名으로 만족해야 했으나 20세기 초 헬링라트, 니체, 릴케 등에 의해 독일 현대 시의 선구자로 재평가받았다. 〈반평생〉, 〈빵과 포도주〉, 〈평화의 축제〉 등 많은 서정시와 소설 《휘페리온》, 미완성의 비극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남겼고, 소포클레 스의 비극, 핀다로스의 승리가 등을 독일어로 옮겼다. 〈판단과 존재〉, 〈종교론〉, 〈소멸 중의 생성〉과 〈비극적인 것에 관하여〉 등 철학과 문학에 대한 에세이를 비롯해 시인의 고뇌와 환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300여 통의 편지가 전해진다. 


옮긴이 | 문성욱

유년을 독일에서 보내고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육군사관학교 철학과 조교수로 근무했으며, 힐데스하임 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2년 《시와 반시》 신인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전쟁 일기》, 니체의 《비극의 탄생》(공역), 노발리스의 《밤의 찬가/철학 파편집》, 트라클의 《몽상과 착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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