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앙토냉 아르토
  • 옮긴이 이진이
  • 발행일 2023년 10월 20일
  • 판형 125×200mm
  • 면수 228쪽
  • 정가 20,000원
  • ISBN 9791193240144
  • 전자책 미출간

책 소개

“고통과 고통 사이 평온하고 맑게 갠 자연 속에서 
그가 미소 짓고 있다.”

규범과 정상성 바깥에서
금지된 무한을 향해 폭발하는 광기와 예술
사유 아닌 감각으로, 말이 아닌 음악으로
몸의 열림과 생의 약동을 생생히 그려낸 ‘잔혹의 시’

20세기 프랑스의 작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의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가 읻다의 산문 문학 시리즈 ‘텍스투라’ 세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연극과 시, 영화와 회화 등 여러 장르를 오가며 활동한 전방위 예술가 아르토는 ‘잔혹극’으로 대표되는 고유의 연극론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독자적인 문학적 탐구를 통해 발전시킨 ‘기관 없는 신체’, 의미와 재현에서 해방된 음성 언어 등은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수전 손택 등 후대의 여러 철학자와 비평가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20세기의 전위극과 부조리극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아르토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와 작품에 관해 쓴 글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와 함께 회화 및 연극을 다룬 짧은 글 다섯 편, 그리고 아르토의 그림을 부록으로 수록하여 아르토의 예술론과 작품 세계를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책을 엮고 옮긴 프랑스 문학 연구자 이진이는 해제에서 아르토의 문학과 연극이 당대 정신의학의 권위와 사회 구조에 저항하는 적극적 실천이었음을 논하며 광기와 예술, 그리고 사회의 관계를 성찰한다. 

“아니다, 반 고흐는 미친 게 아니었다.”
스스로 빛을 밝힌 자, 빈센트 반 고흐
누가 그를 광인으로 규정하는가

1947년,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회화전이 열렸다. 한 예술 주간지는 전시 소식을 알리며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조아킴 비어의 글을 통해 화가와 그의 작품을 소개했다. 비어에 따르면 반 고흐의 일생 대부분은 신경 정신적 퇴화의 증거로 가득차 있고, 광기가 그의 천재성을 낳았으며 그의 예술 활동은 정신적 문제들에서 기인한다. 이 글을 접한 앙토냉 아르토는 “한낱 의사의 빌어먹을 수술칼이 위대한 화가의 천재성을 내리 만지작거리게 둘 수 없다”고 격분하며, 이에 대한 반박으로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를 집필했다. 

이 글에서 아르토는 병리학적 진단으로 대상화된 반 고흐의 생을 의학의 폭력으로부터 구출하여, 그의 생이 지닌 날것의 경련을 시적 언어로 되살리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아르토가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를 통해 포착하려는 반 고흐의 삶은 그가 잔혹극의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 삶과 다르지 않다. 이때 아르토가 말하는 ‘잔혹’이란 피가 튀는 잔인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건조한 사실들의 나열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존재의 심장 박동, 그 생명의 헐떡거림과 경련으로서의 ‘생’” 그 자체다.(옮긴이 해제, 171쪽) 아르토는 사유를 넘어선 감각으로, 말이 아닌 음악으로 반 고흐의 그림 속에서 꿈틀대는 생의 약동에 다가간다. 

“달아오른 폭탄 냄새를 맡아보지도, 아찔한 현기증을 느껴보지도 못한 사람은 마땅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 이것이 가련한 반 고흐가 이글대는 불꽃으로 표명하고자 했던 위안이다.” 

본문 중에서

아르토는 이 과정에서 반 고흐에 대한 정신의학적 판단과 규정, 나아가 정신의학이 지닌 권위와 사회 구조 자체를 근본부터 재론하며, 사회와 정신의학의 공모 관계를 통찰한다. 거짓과 위선, 부르주아적 관성과 타자에 대한 멸시로 병든 사회는 정신의학을 발명해 자신의 호위병으로 삼고, 정상성이라는 규범에 따라 개인을 통제하고 평준화하려 한다. 자유분방한 생의 박동은 의학과 사회에 의해 광기로 축소 해석된다. 그러나 반 고흐는 이러한 사회와 공범이 되기를 거부하며 스스로 광인의 길을 선택한 ‘진정한 광인’이다. 아르토에 따르면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니체, 횔덜린, 로트레아몽과 같은 작가들 또한 사회가 금지한 무한을 살고자 했던 ‘진정한 광인’에 속하며, 이들은 규범 바깥에 놓인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게 사회가 입을 틀어막고자 했던 사람”이다.(42쪽)

아르토 역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해 약 9년간을 감금 상태로 지낸 적이 있다. 그가 경험한바 정신의학은 ‘완벽한 정상인’을 만들기 위해 정신을 해체하고 통제 가능한 것, 정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재건하려 든다. 그러나 아르토는 자신의 고통을 의학에 양도하여 사회가 정한 신체적, 도덕적 표준에 포섭되기를, 그리하여 ‘치료’되기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나는 내 고통의 주인이다.” “내 안의 것에 대한 심판자는 오직 나다.” 개개인이 지닌 고유한 내적 풍경은 결코 사회가 정한 단 하나의 표준적 풍경화에 맞춰질 수 없다. 반 고흐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밝히기 위해 모자에 열두 개의 초를 달고 밤 풍경을 그리러 밖으로 나간 명민한 이였다. 그렇게 태어난 그의 작품들은 폭발 직전의 에너지를 오롯이 간직하고, 아르토는 화폭을 경련케 하는 이 진동에서 음악이 솟아남을 느낀다. 반 고흐의 이 음악에 아르토는 텍스트의 독재에서 벗어난 음성 언어, 말 바깥으로 떠난 방언으로 화답한다. 

회화와 시, 연극을 관통하는 
생의 진동과 잔혹의 시학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에는 아르토가 연극을 통해 쌓아올린 고유의 예술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서구 연극은 현실적 질서를 단순히 재현하고 갈등을 관습적으로 해결할 뿐, 기존하는 도덕적, 사회적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연극은 저녁 시간의 여흥으로 전락하여 관객을 단순히 엿보는 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연극은 부당한 사회 상태를 전복하고 관객의 신경과 심장을 깨워야 한다. 이에 아르토는 새로운 연극인 잔혹극을 제안하여 배우의 몸, 공간의 공기, 관객의 몸을 진동시키며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무화시키고자 한다. “빠져나올 수 없는 답보 상태와 고통 속에서도 돌파하여 작동하는 이 생, 순수하고 냉혹한 이 감정, 이것이 바로 잔혹이다.”(《연극과 그 이중》) 반 고흐의 그림에는 아르토가 연극을 위해 찾아 헤매던 잔혹의 감정이 선연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런데 아르토는 연기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인만큼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책에 부록으로 실린 다섯 편의 글은 그가 자신의 전시 〈앙토냉 아르토가 그린 초상화와 데생〉을 위해 쓴 것으로, 연극과 시, 회화를 관통하는 그의 예술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연극이란 단지 “무대 위의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 불덩이와 진짜 고깃덩어리로 된 도가니”로서 생의 감정을 일깨워야 하며(149쪽), 이는 회화를 비롯한 다른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이 편린들은 상이한 예술 분과들이 어떻게 하나의 관점 아래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며, 예술의 저항적 책무를 잔혹의 언어로 선언한다. 


차례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
서문
사회가 자살시킨 자 

부록
배우를 미치게 만들기
사람의 얼굴은 임시적으로…
사람의 얼굴
갤러리 피에르에서 낭독하기 위해 쓴 세 편의 글
연극과 과학

옮긴이 해제 · ‘진정한 광인’ 아르토의 반 고흐론, 혹은 잔혹의 시


책 속에서

반 고흐는 응당 모든 화가들 중에서 가장 진정으로 화가인 자로 남을 것이다. 작품이라는 엄정한 수단과 자신이 가진 도구라는 엄격한 틀로 한정되는 회화, 그 회화를 넘어서고자 하지 않았던 유일한 자.
또한, 자연에 대한 이 독점적 재현 속에서 반격의 힘, 심장 한가운데에서 끄집어낸 요소를 솟아오르게 만들기 위해, 자연을 재현하는 관성적 행위인 회화를 절대적으로 넘어선 유일한 자, 절대적으로 유일한 자. […]
내가 이 몇 줄의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반 고흐의 핏빛 붉은 얼굴이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갈린 배 사이로 내장이 드러난 해바라기들이 성벽처럼 늘어서 있는 곳에서,
부연 히아신스와 보랏빛 청색 풀때기가 불똥을 튀기며 타오르는 장관 속에서.

74-75쪽

반 고흐 그림의 격하게 몰아치는 빛은 우리가 그림에서 시선을 뗀 순간, 그 어둠의 낭송을 시작한다.

고작 화가일 뿐인, 단지 그뿐인 반 고흐,

철학도, 신비도, 의례도, 심리술도, 제식도 없이,

역사도, 문학도, 시도 없이,

그의 그을린 금빛 해바라기가 그려졌다.

76쪽

연극은 / 인간의 해부학을 붙잡아 / 그것으로 삶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 상태, / 장소, / 지점이다. / 그래, 생生을, 그것의 흥분, 울부짖음, 꾸르륵댐, 텅 빈 구멍, 가려움, 홍조, 멈춘 순환, 핏빛 소용돌이, 피의 성마른 돌진, 기분의 매듭, / 회복, / 망설임까지도.

109쪽

사람의 얼굴은 텅 빈 힘, 죽음의 벌판이다.

제 몸과 결코 어울리지 않았던, 몸이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했던 하나의 형태를 갈구하는 오래된 혁명적 요구. […]

사실 사람의 얼굴은 제 얼굴 위에 일종의 영원한 죽음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으로부터 얼굴을 구해내는 것은 분명 화가에게 달린 일이다,

얼굴에 그 고유의 생김새를 돌려줌으로써.

119-120쪽

오직 반 고흐만이 인간의 머리에서, 터져버린 심장 박동의 폭발하는 불꽃과 다름없는 하나의 초상화를 이끌어낼 줄 알았다.

바로 자기 자신의 초상화를.

중절모를 쓴 반 고흐의 머리는, 영원이 다 할 때까지 반 고흐 그 자신 이래로 그려질 수 있을 추상화의 모든 시도를 무화하고 불가능하게 만든다.

121쪽

인간의 호흡에는 급변하고 부서지는 여러 음조가 있고, 비명과 비명 사이에서 그 전이는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이를 통해 불현듯 사물들의 몸 전체가 열리고 솟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이러한 몸의 열림과 약동은 우거진 산림에서 산에 기대어 세워 둔 나무 한 그루처럼, 팔다리 중 하나를 받치거나 쓰러뜨릴 수 있다.

154쪽

사회 내부에 조신하게, 또는 마지못해 통합되는 대신, 사회가 관성적 안정을 위해 마련한 갖가지 경계선을 교란하고 겉치레 아래 본색을 꿰뚫어보는 위험 분자들이 있다. 부르주아적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제도 그 자체를 뒤흔드는 의식, 사회를 향한 탐문 조사를 시도하는 우월하고 총명하며 통찰력 있는 의식, 어떤 틀에도 맞춰지지 않고 불거져 나오는 그 광포한 의식을 사회는 정신의학을 내세워 말도 안 되는 섹슈얼리티의 기준을 빌미 삼아 광인으로 명명하고 수감하여 치료를 빙자해 제압한다. “모든 광인에게는 이해받지 못한 천재성이 있다. 그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생각은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고, 삶이 그에게 마련해준 질식으로부터의 탈출구는 오직 광기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56쪽) 아르토는 사회의 억압으로 인해 광기로밖에는 표출될 수 없는 광인들의 천재성이 “반항적 자기주장의 약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광인으로 규정당하는 의식의 주체, 진정한 광인으로 사는 주체는 사회의 갖가지 틀이 개인성의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발휘를 좌절시키는 덫임을 매 순간 온몸으로 느끼기에, 또한 매 순간 온몸으로 사회와 불화하는 존재다.

184쪽, 옮긴이 해제

자신의 고통을 의학에 양도하는 것, 그렇게 존재 전체가 의학과 사회가 정한 신체적, 도덕적 표준 범주에 포섭됨으로써 사회와 타협하는 것, 그것이 ‘치료’된다는 것의 아르토적인 의미인지도 모른다. “나는 평생 아팠으며 이 고통이 지속되기만을 바란다. 왜냐하면 생명이 결손된 상태는 내 넘치는 역량에 관해 ‘건강하기만 하면 됐다’라는 프티부르주아적인 포만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범죄다.” 고통은 치료가 목적일 때는 의학과 사회의 대상이 되지만, 고스란히 겪어 내리라는 다짐 하에서는 자기 자신의 삶 그 자체가 된다. 아르토는 말한다. “나는 내 고통의 주인이다.” 그에게 병은 하나의 상태다. 건강은 병든 상태보다 “더 추하고 비겁하고 치사한” 또 다른 하나의 상태일 뿐이다. 

198-199쪽, 옮긴이 해제

“하나의 거대한 코스모스로서의 우주는 없습니다. 개개인은 오직 자기에게만 속하는 자기만의 세계입니다. 개인은 자신의 세계를 살아 있게 만듦으로써, 다시 말해 팔과 손과 다리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이고 빼앗길 수 없는 의지의 숨결로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그 세계에 입문할 수 있습니다. […] 세상에 태양, 달, 별이 있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반 고흐가 열두 개의 촛불을 단 모자를 쓰고 밤중에 그림을 그리러 간 것처럼 각자가 스스로 자기만의 불빛을 밝히는 참된 세상에서처럼 행동하지 않고, 보편적 빛이라는 이 점에 관해 신이라 불리는 양아치 개념에 동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 외부의 자연이나 타인에게서 찾지 않아도 인간의 몸에는 충분한 태양과 행성, 강과 화산, 바다와 늪지가 있는데도 말이죠.”

207쪽

지은이 |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본명 앙투안 마리 조제프 아르토(Antoine Marie Joseph Artaud). 1896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18세부터 각종 신경성 질환 때문에 유럽 각지의 요양·치료 시설을 전전했다. 1920년 정신과 의사 에두아르 툴루즈가 있는 파리로 상경해, 그가 편찬하던 《드맹(Demain)》지에 시와 서평을 썼다. 1921년 샤를 뒬랭 극단의 배우로 연극에 입문했다. 1923년 잡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La Nouvelle Revue Française)》에 시 두 편을 보냈으나 게재 거부되었고, 이 과정에서 편집인 자크 리비에르와 주고받은 서신이 1924년 출간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문단에 들어서며 1925년 다양한 장르의 짧은 글을 모은 《신경저울(Le Pèse-Nerfs)》, 《림보의 배꼽(L’Ombilic des Limbes)》을 발표했다. 초현실주의에 참여하고 영화 배우로 활약했으며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1926년 알프레드 자리 극단을 만들어 실험적 연극을 연출했다. 1931년 파리 식민박람회에서 본 발리 춤에 영감을 받아 ‘잔혹극’으로 대표되는 고유의 연극론을 쓰기 시작했다. 1935년 잔혹극 《첸치 일가》가 실패한 뒤 멕시코와 아일랜드를 여행했다. 1937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로 강제 추방된 후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입원 중이던 1938년 연극론 《연극과 그 이중》이 출간되었다. 1946년 퇴원 후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를 집필하고, 직접 그린 초상화와 데생으로 전시회를 준비하며 여러 편의 글을 썼다. 1948년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로 생트뵈브 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파리 근교 이브리의 요양원에서 직장암 혹은 마약성 진통제 과용으로 사망했다.


옮긴이 | 이진이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파리 대학교(구 파리 7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지은 책으로 《불가능한 목소리》(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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