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루쉰
  • 옮긴이 김택규
  • 원제 死火
  • 발행일 2021년 10월 13일
  • 판형 115×190mm
  • 면수 172쪽
  • 정가 12,000원
  • ISBN 9791189433383
  • 전자책 미출간

책 소개

근대의 경계에 선 시인,
루쉰의 고전시와 현대시를 한 자리에서 만나다

읻다 시인선 12권. 훗날 마오쩌둥이 “루쉰의 방향이 바로 중국 민족 신문화의 방향”이라 평가한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루쉰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설과 산문 이외에도 89편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중국의 근대화와 삶의 이력을 함께 한 루쉰은 고전시와 현대시를 함께 남겼는데,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1927년 발표된 《들풀野草》에 수록된 산문시 23편이다. 시 선집 《죽은 불死火》은 루쉰의 자유체 시, 산문시, 민가체 시를 포함하는 현대시 35편과 5·7언의 율시와 절구, 초사체楚辭體 시, 보탑시寶塔詩를 포함하는 고전시 54편에서 각기 23편과 10편, 총 33편을 가려 뽑았다.

‘시대적 정열’과 ‘진실성’
시인 루쉰의 문학적 이상

《죽은 불》은 루쉰의 대표적인 산문시로 알려진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고전시를 포함해 루쉰의 일생에서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1900년 2월, 신학당 수학기에 쓴 〈아우들과 이별하며〉를 시작으로 1935년 12월에 쓴 〈을해년 늦가을에 무심코 짓다〉까지 담은 이 선집은 루쉰이 고전시로 시 쓰기를 시작하여 현대시 쓰기를 병행하다가 다시 고전시를 쓰는 여정을 보여줌으로써 루쉰의 문학관을 드러낸다.

보통 사람의 마음에도 시가 없을 수 없으니, 시인이 시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는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를 읽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 자신에게도 시인의 시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시가 있기는 하지만 말로 표현하지를 못할 뿐인데, 시인이 대신 말로 표현하여 채를 잡고 현을 퉁기면 읽는 사람 마음속이 현에 공명한다. 그 소리는 영부에까지 울려 모든 감정 있는 생물로 하여금 아침 해를 바라보듯 고개를 들게 하고, 더 나아가서 아름다움과 위대함, 강력함과 고상함을 발양시켜 더러운 평화가 그로 인해 파괴될 것이다. 평화가 파괴되면 인도人道가 증대된다.

<악마파 시의 힘을 논함>


루쉰은 1908년 봄에 발표한 〈악마파 시의 힘을 논함摩羅詩力設〉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지향인 ‘시대적 정열’과 ‘진실성’이라는 신문학의 이상적 명제를 처음 드러내며 시의 본질과 시의 정치적·계몽적 효용 등에 대해 논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루쉰의 문체로 잘 알려진 계몽적이면서도 전복적인 힘에 대한 믿음만이 루쉰의 유일한 시론은 아니다. ‘노골화된 정치적 파시즘의 횡행’ 속에 신시 창작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자신에게 익숙한 구문화 미학의 영향 아래, 신시 창작을 포기하게 된 루쉰은 이렇게 회고하기도 한다.

나더러 시에 대해서 말하라니 실로 천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이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나는 한번도 연구해 본 일이 없으므로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더우인푸竇隱夫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1934년)

역사와 반응하며 변화하는 루쉰의 시 쓰기

루쉰의 시작법과 시에 대한 입장은 중국의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반응하며 변화한다. 선집에 소개한 33편의 시의 끝에 시를 지은 연도를 표기한 것은 이러한 흔적을 살피는 하나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죽은 불》의 역자 김택규는 스스로 봉건 중국과 신중국이라는 역사 단계 사이의 중간물中間物 이라고 여긴 루쉰이 일생 동안 지속해서 썼던 시를 통해, 문필가 루쉰에게서 시인의 특성을 다시 발견하길 바란다. 초기 고전시 창작 시기에서 루쉰은 반청反淸 운동과 함께 봉건 중국에서 탈피하고자 했으며 이는 〈전진가〉와 〈전투가〉 등 정치성을 짙게 띤 시로 나타난다. 이어서 1919년 5·4운동 이후 1927년 4·12정변에 이르는 시기까지 현대시 창작에 매진한다. 이 시기의 결과물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들풀野草 》이다. 이 작품은 “산문과 운문의 중간적 특성을 지닌 산문시 형식의 이점을 이용하여”, “ 루쉰 자신의 서정성을 폭넓게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 했다. 1918년, 자신의 최초의 현대시인 〈꿈〉을 발표한 루쉰은 신문화의 적극적 수용과 함께 외국문학 수용 과정에서 습득한 “ 상징적 표현과 철학적 알레고리” 를 실험하며, 자신의 미학적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고전시로의 회귀
익숙한 언어로 일상과 사회를 그리기

저우 선생은 눈을 감고 있어도 꼭 잠을 자는 건 아니었어요. 왕왕 이 때 묵묵히 시구를 읊조리곤 했어요. […] 그분이 낮잠을 깨고 하는 첫 번째 일은 책상 앞에 앉아 쪽지 하나를 꺼내고는 완성된 시구를 적는 거였어요. 한 연이나 혹은 두 연인 적도 있었으니까 반드시 한 편을 다 쓴 건 아니었어요. 그러고는 서랍 안에 넣어두었어요. 새로운 시구를 얻었을 때는 즉시 쪽지에 적어두었고, 새로운 시구가 안 나오는 날엔 쌓아둔 여러 시구들을 펴서 다시 읽어보고는 몇 구를 첨가해 한 편을 완성하기도 하고 맘에 안 드는 시구를 몇 자 고치기도 했어요. 또는 꾸깃꾸깃 뭉쳐서 휴지통에 버리기도 했고요.

루쉰 서거 후 쉬광핑許廣平 인터뷰, 〈옮긴이의 말〉 중에서

1927년 이후, 루쉰은 사회적 관계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일상 공간에서 현대시보다 문언문 문학 토양에서 자란 자신에게 익숙한 고전시 창작으로 회귀한다. 신문단의 첨단에 서있던 루쉰의 이러한 행보는 일관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선집의 구성을 통해 신문화의 전사의 모습을 한 루쉰으로만 그의 문학을 바라보는 편견을 걷어내고 시대의 경계에 놓인 중간자로서의 루쉰, 형식을 넘어 동시대의 정열과 함께 자신의 체험을 솔직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시적 진실성을 추구하는 시인 루쉰으로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차례

아우들과 이별하며·1
연꽃송이
아우들과 이별하며·2
내 사진에 부쳐
판아이눙을 애도하며

사람과 시간
《들풀》 서시
가을밤
그림자의 고별
거지
복수
복수·2
희망


아름다운 이야기
죽은 불

개의 질책
잃어버린 좋은 지옥
묘비문
쇠약한 선의 떨림
의견
죽고 나서
이런 전사
마른 잎
희미한 핏자국 속에서
한 가지 깨달음
긴 밤에 익숙해져
무심코 쓴 시
《방황》에 부쳐
무제
을해년 늦가을에 무심코 짓다


옮긴이의 말


책 속에서

헤어져 다시 일 년을 보내야 하는데
만 리 긴 바람이 객선을 떠나보낸다
다들 기억해야 할 말 하나 있으니
삶의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지 않다

〈아우들과 이별하며 1〉 중에서

어둠 속에선 모른다, 신열과 두통을
이리 오라, 이리 와, 또렷한 꿈이여!

〈꿈〉 중에서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꽉 차 있음을 느낀다. 입을 열려고 하면 동시에 공허함을 느낀다. 과거의 생명은 이미 죽었다. 나는 이 죽음이 매우 기쁘다. 이로써 일찍이 그것이 살아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죽은 생명은 이미 부패했다. 나는 이 부패가 매우 기쁘다. 이로써 그것이 아직 공허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들풀》 서시〉 중에서

음험한 눈을 깜박이던 하늘은 더욱 파래지고 불안해져 마치 달만 남겨둔 채 인간 세상을 떠나 대추나무를 피하려는 듯하다. 달도 슬그머니 동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나무줄기는 기괴하고 높은 하늘을 계속 묵묵히 쇠꼬챙이처럼 곧게 찌르고 있다. 하늘 이 아무리 고혹적으로 이리저리 눈을 깜박여도 오로지 그를 죽이겠다는 일념뿐이다.

〈가을밤〉 중에서

나는 홀로 먼 길을 떠나련다, 너도 없고 다른 그림자도 없는 어둠 속으로. 내가 어둠 속에 묻혀야만 세계는 온전히 나 자신에 속한다.

〈그림자의 고별〉 중에서

나는 베풂도 못 얻고 베푸는 마음도 못 얻을 것이다. 베푸는 자의 짜증과 의심과 미움만 얻을 것이다. 나는 무심함과 침묵으로 구걸할 것이다…….

〈거지〉 중에서

그래서 드넓은 광야만 남았고 그 두 사람은 거기에서 발가벗은 채, 날카로운 칼을 쥔 채 건조하게 서 있었다. 죽은 사람의 눈빛으로 행인들의 그 건조함과 무혈의 대살육을 감상하고서 생명의 비상하는, 극도의 대환희 속에 영원히 잠겼다.

〈복수〉 중에서

난 그저 맨손으로 이 공허 속 어두운 밤과 싸워야 한다. 몸 밖의 청춘을 못 찾더라도 어떻게든 스스로 몸속의 황혼을 내던져야 한다. 그런데 어두운 밤은 또 어디 있을까? 지금은 별도 없고 달도 없고 웃음의 아련함과 사랑의 춤추는 비상도 없다. 젊은이들도 매우 평온하여 내 앞에는 진짜 어두운 밤도 없어져 버렸다.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희망〉 중에서

끝없는 광야 위에서, 혹한의 하늘 아래에서 반짝이며 맴돌고 솟아오르는 비의 영혼……. 그렇다, 그것은 고독의 눈이고 죽은 비이며 비의 영혼이다.

〈눈〉 중에서

만다라꽃은 바로 시들었다. 기름은 예전처럼 끓어올랐고 불꽃도 예전처럼 뜨거워졌다. 뭇 영혼도 예전처럼 신음하고 예전처럼 몸부림치느라 잃어버린 좋은 지옥을 떠올릴 틈도 없어졌다.
그것은 인간의 성공이자 영혼의 불행이었다…….
친구여, 너는 나를 의심하고 있구나. 그래, 너도 인간이었지! 나는 차라리 야수와 악귀를 찾아 나서야겠다…….”

〈잃어버린 좋은 지옥〉 중에서

나는 가려고 했다. 그런데 시체가 어느새 무덤 속에서 일어나 앉아 입술도 안 움직이고 말을 했다.
“내가 먼지가 되었을 때 너는 내 미소를 보게 되리라!”
나는 달렸고 감히 돌아보지 못했다. 그가 쫓아오는 것을 볼까 두려웠다.

〈묘비문〉 중에서

말 없는 언어를 말하고 있을 때 석상처럼 위대하지만 이미 황폐하고 쇠약해진 그녀의 육신이 송두리째 떨렸다. 그 떨림은 하나하나 고기 비늘 같았고 그 고기 비늘은 하나하나 뜨거운 불 위의 물처럼 들끓었다. 허공도 즉각 폭풍우 속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한꺼번에 떨렸다.

〈쇠약한 선의 떨림〉 중에서


지은이 | 루쉰

본명 저우수런周樹人.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소설집 《외침吶喊》과 《방황彷徨》 그리고 《화개집華蓋集》, 《이이집而已集》, 《차개정잡문且介亭雜文》 등에 수록된 수많은 수필과 비평으로 중국 현대문학의 기틀을 다진 선구자로서 훗날 마오쩌둥에게 “루쉰의 방향이 바로 중국 민족 신문화의 방향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루쉰은 소설과 산문 외에도 별도로 89편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고대와 근대에 걸친 삶의 이력으로 인해 구어문으로 쓴 현대시가 35편, 고문으로 쓴 고전시가 54편이며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1927년 발표된 《들풀野草》에 수록된 산문시 23편이다. 이 시들에서 루쉰은 산문에서와는 달리 본인의 존재론적 고뇌와 일상의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옮긴이 | 김택규

1971년 인천 출생. 중국 현대문학 박사, 숭실대학교 중어중문과 겸임교수. 옮긴 책으로 《이중톈 중국사》, 《죽은 불 다시 살아나》, 《암호해독자》, 《책물고기》 등이, 지은 책으로는 《번역가 되는 법》, 《번역가 K가 사는 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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