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김준서·이종현·이덕균·서명삼·한상원·이헌미·노민정·박규태·원정현·최재인·김성재
  • 기획위원 김영욱·박동수·박민아·최화선
  • 발행일 2023년 6월 15일
  • 판형 152×223mm
  • 면수 260쪽
  • 정가 20,000원
  • ISBN 9791189433833
  • 전자책 미출간
  • 정기구독 안내


책 소개

감각과 체험에서 사유와 이론까지
전쟁의 수많은 얼굴을 마주보다

시대와 분과를 가로지르며 최신 이론과 사상의 동향을 소개하는 읻다의 서평 무크지 《교차》 4호 《전쟁하는 인간》이 출간되었다. 4호는 인류의 역사와 결코 뗄 수 없는 주제인 ‘전쟁’을 고전학, 문학이론, 문화연구, 종교사회학, 정치철학, 역사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한다. 전쟁은 인간이 무리를 이루어 생활한 이래 그친 적이 없었으며, 인류의 역사를 추동하고 견인하며 뒤엎고 파괴해 왔다. 그런데 전쟁이란 민족, 종교, 국가와 같은 거대한 집단 간의 문제일 뿐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기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에 ‘주제 서평’ 6편은 전쟁에 관한 감각과 체험을 다루는 글, 그리고 사유와 이론을 논하는 글로 구성되며, 각 서평의 논제는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우선 ‘감각’의 면에서는 트로이아 전쟁을 노래한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출발하여, 2차 대전에 참전한 소녀 병사들의 체험담, 테러와의 전쟁을 소재로 한 비디오 게임을 다룬다. 각 서평은 거대 서사가 담지 못하는 낱낱의 이야기와 그에 관한 문학적 재현 및 해석, 그리고 게임이라는 매체가 재현을 통해 정치적 질서를 재생산하는 방식을 검토한다. ‘사유’의 면에서는 종교와 테러의 관계, ‘정의로운 전쟁’의 가능성, 알제리 독립 전쟁을 차례로 고찰한다. 이들 글은 정치가 신앙과 결부되며 테러와 전쟁으로 이어지는 양상, 그렇게 발생하는 전쟁의 부당성과 정당성에 관한 도덕적 논의, 식민주의의 ‘부당한’ 폭력에 맞선 피식민자의 ‘정당한’ 폭력의 사례를 논한다. ‘비주제 서평’ 5편은 자기이론(autotheory), 종교인류학, 과학사, 젠더 경제학, 특수교육학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저술을 짚어본다. 

개개인이 살아낸 전투의 영광과 폭력의 참화
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목소리들

4호의 주제 서평은 개인의 경험과 개별 사건이 지닌 구체성과 특수성, 그리고 사유와 이론이 지향하는 포괄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 관계를 고려해 구성되었다. 먼저 주제 서평을 여는 책은 트로이아 전쟁을 노래한 전쟁 문학이자 서구 문학의 출발점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이 목도한 2차 세계 대전을 바라보는 철학자 시몬 베유의 논고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다. 서양고전학 연구자 김준서는 두 책에 관한 서평 〈인간 조건의 비극성으로부터 구원을 찾다〉에서, 《일리아스》의 전쟁터가 인물들이 영웅적 탁월함을 발휘하는 활약의 장이자 끔찍한 폭력이 만연한 참사의 장으로 그려진다는 데 주목한다. 전쟁의 양면성에 관한 이러한 독해를 바탕으로, 서평자는 베유가 트로이아 전쟁과 2차 대전을 중첩해 끌어내는 호메로스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무공의 영광을 향한 갈망과 폭력의 참상에 대한 혐오라는 양가적 요소는 이어지는 서평에도 나타난다. 두 번째 글 〈우리는 물고기처럼 입을 다물었어〉는 2차 대전에 참전한 소련 여성 병사들의 증언을 엮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평한다. 서평자인 러시아문학 연구자 이종현은 전방에서 영웅적 공훈을 이루고자 하는 소녀 병사들의 바람이 단순한 관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욕망’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종전 후 이들은 전투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멸시로 고통받게 되며, 자신이 겪은 참상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해 물고기가 수면의 얼음을 두드리듯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서평은 얼음 너머로 이들의 입 모양을 읽어내려는 저자의 노고에 주목하며,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매끄러운 영웅 서사로는 담아낼 수 없는, 범속한 개인들의 고유한 진실을 짚어낸다. 

다음 서평은 비디오 게임에서의 전쟁 재현을 살핀다. 철학 연구자 이덕균의 〈게이머는 병사로 다시 태어나는가〉는 매슈 토머스 페인의 《전쟁 게임: 9·11 이후의 밀리터리 비디오 게임》이 ‘테러와의 전쟁’을 소재로 한 밀리터리 FPS 게임에서 기술과 문화, 정치가 교차하는 양상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검토한다. 페인에 따르면 〈모던 워페어〉 시리즈와 같은 게임은 미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작업을 수행하며, 플레이어는 현실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테러 상황을 게임 속에서 ‘체험’함으로써 테러와의 전쟁이 지닌 정당성과 필요성을 확신하게 된다. 서평은 저자의 연구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매체에 대한 학술적 관심을 촉구한다.

전장에서 한 걸음 떨어진 “비판과 사유의 자리”
종교, 도덕, 정치와 폭력 사이의 무수한 지층

다음의 세 글은 전쟁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다룬다. 대테러 전쟁에서 정치와 문화의 관계를 다룬 앞선 논의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묻는 종교사회학적 성찰로 이어진다. 종교인류사회학자 서명삼의 〈이라크 전쟁 20주년을 맞아 돌아본 종교와 폭력의 관계〉는 종교학자 브루스 링컨의 《거룩한 테러: 9·11 이후 종교와 폭력에 관한 성찰》을 통해 포스트 냉전 시기 종교와 정치, 테러리즘을 둘러싼 현대 종교학의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논쟁을 돌아본다. 종교에 기반을 둔 알 카에다의 폭력 행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계몽주의 이래 서구 인문사회과학을 지배해 온 세속화 테제의 실패, 서구 중심적 종교 정의라는 종교학의 근본적 문제, 냉전 이후 세계의 지정학적 상황 등 여러 맥락이 중층적으로 개입한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옹호하는 진영은 ‘정의로운 전쟁’에 관한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입장, 즉 정전론의 계보를 이으며, 다음 서평은 이 정전론을 논한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의 《마르스의 두 얼굴: 정당한 전쟁·부당한 전쟁》은 정전론의 전통을 현대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계승한 현대 전쟁 이론의 고전으로, 정치철학자 한상원은 〈전쟁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서 왈저의 주장이 지닌 의의와 한계를 짚어본다. 왈저는 모든 전쟁을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평화주의, 그리고 전쟁을 도덕과 분리된 힘의 장으로 보는 현실주의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전쟁을 ‘도덕적 실상(reality)’으로 간주한다. 서평자는 왈저의 이론이 제국주의와 같은 국제 관계 내 권력 역학을 고려하지 않기에 추상적인 수준에 그친다고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도덕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전쟁’이 존재한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한다.

뒤이은 서평은 이런 관점에서 ‘정당한 전쟁’으로 분류할 만한 식민지 항쟁의 사례를 다룬다. 국제정치학자 이헌미의 〈존재의 탈식민화와 세계의 인간화를 위하여〉는 알제리 전쟁에 관한 탈식민 지성사를 전개하는 사학자 노서경의 저작 《알제리전쟁 1954-1962: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을 통해 탈식민주의와 폭력의 관계를 성찰한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벌어진 이 전쟁 기간에는 정치적 폭력의 본질과 정당성을 놓고 파농, 사르트르, 카뮈 등 양국의 지식인 사이에서 치열한 찬반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서평은 각각의 입장을 소개하며, 형식적 도덕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당사자들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요청한다. 서평자의 이런 요구는 위대한 소수의 영웅이 아닌 수많은 민중들의 목소리로 가득 찬 책의 서술 방식과 공명하며, 주제 서평을 열었던 개개인의 서사를 상기시키면서 삶과 이론의 관계를 반추하게 한다. 

책 속에서 교차하는 삶, 시대, 사유

‘비주제 서평’에 수록된 첫 두 편의 글은 폭력에 관한 성찰을 다루며, 전쟁에 관한 주제 서평의 사유를 폭력 일반으로 확장한다. 종교학자 노민정의 〈남겨진 폭력의 아카이브, 정의의 다정한 얼굴을 찾아서〉는 미국의 종교학자 로라 레빗이 본인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담아 쓴 책 《남겨진 사물들(The Objects That Remain)》을 통해 근래 영미권에서 여성학 및 퀴어 예술의 방법론으로서 재발견된 장르인 자기이론(autotheory)을 소개하고, 폭력 이후의 삶을 고민한다. 종교학자 박규태의 〈르네 지라르, ‘양의성’으로 다시 읽기〉는 르네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논한 ‘희생양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폭력에 내재한 상관적 대립 구조를 고찰한다.

이어지는 세 편의 서평은 과학사, 젠더 경제학, 특수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성찰한다. 과학사학자 원정현의 〈기후 위기의 시대, 훔볼트를 다시 생각하다〉는 19세기 독일의 자연학자 훔볼트의 삶을 다룬 평전 《자연의 발명: 잊혀진 영웅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읽으며 오늘날 당면한 기후 위기 문제에 훔볼트의 사상이 줄 수 있는 시사점을 짚어보고, 서구 근대 과학의 발전에 비서구 세계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주목한다. 미국사 연구자 최재인은 〈어떤 바통을 들고, 어디로 달릴 것인가〉에서 20세기 미국 여성의 전문직 진출을 다룬 노동경제학자 클라우디아 골딘의 저서 《커리어 그리고 가정: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기나긴 여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서평자에 따르면 이 책에서 골딘은 남성 중심적 사회 구조, 제도적 차별, 이데올로기적 압박 등을 간과하고, 자본주의적 경쟁 구조라는 더 큰 문제로 결론을 확장하지 않는 등 한계를 보인다. 철학 연구자 김성재의 〈페르낭 들리니, 혹은 이해 불가능성의 윤리〉는 20세기 프랑스의 교육자이자 시인인 페르낭 들리니의 저작물을 엮은 《전집(Oeuvre)》을 읽어나가며, 도구적 언어 바깥에서 살아가는 발달 장애 아동·청소년과 함께 평생을 보낸 들리니의 삶을 조명한다. 서평자는 합리적 규율과 정상성 너머에 존재하는 이들의 고유한 질서에 접근할 방법을 들리니의 시적 언어에서 찾는다. 

시대와 분과를 가로지르는 지식의 교차로
읻다의 본격 서평 무크지 《교차》

2021년 읻다에서 창간한 서평지 《교차》는 연 2회 발행되며, 학술서를 중심으로 국내외 여러 분야의 책을 다룬 10여 편의 서평을 수록한다. 각 서평은 학술지 논문에 준하는 분량으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책의 논지와 이를 둘러싼 맥락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자신의 해석을 개진하여 오늘의 연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시대의 분기점이 된 고전과 최신의 연구를 종횡으로 오가며 교차점을 모색하고, 오래된 질문과 참신한 사유를 지금 여기의 문제와 연결 짓기 위한 가능성의 지평을 탐색한다. 이로써 책을 통해 축적된 사유가 서평을 매개로 맞부딪치는 지적 교류의 장을 지향한다. 


차례

서문

최화선 • 전쟁의 감각과 사유

주제 서평

김준서 • 인간 조건의 비극성으로부터 구원을 찾다 • 《일리아스》·《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이종현 • 우리는 물고기처럼 입을 다물었어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덕균 • 게이머는 병사로 다시 태어나는가 • 《전쟁 게임》

서명삼 • 이라크 전쟁 20주년을 맞아 돌아본 종교와 폭력의 관계 • 《거룩한 테러》

한상원 • 전쟁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 《마르스의 두 얼굴》

이헌미 • 존재의 탈식민화와 세계의 인간화를 위하여 • 《알제리전쟁 1954-1962》

비주제 서평

노민정 • 남겨진 폭력의 아카이브, 정의의 다정한 얼굴을 찾아서 • 《남겨진 사물들》

박규태 • 르네 지라르, ‘양의성’으로 다시 읽기 • 《폭력과 성스러움》

원정현 • 기후 위기의 시대, 훔볼트를 다시 생각하다 • 《자연의 발명》

최재인 • 어떤 바통을 들고, 어디로 달릴 것인가 • 《커리어 그리고 가정》

김성재 • 페르낭 들리니, 혹은 이해 불가능성의 윤리 • 《전집》


책 속에서

《일리아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한 전사들을 야수성(bestiality)과 신성(divinity)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놓인 위태로운 존재로 그려낸다. 그들이 행사하는 힘은 진저리를 치게 만드는 잔혹한 학살극을, 그리고 피해자들의 탄식과 비탄을, 심지어는 자신의 파멸을 초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힘은 자신 또한 그 희생자가 되리라는 운명을 직시하고 최전선에 뛰어드는 영웅적 행위의 동력이기도 하다. 죽음을 대가로 필멸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불멸의 명성을 획득하려는 전사들의 모습을 통해, 호메로스는 인간의 잔혹성과 영웅적 탁월함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짐 없이 동등하게 그려낸다. 전쟁이 초래하는 야만적 잔혹성에 청중이 몸서리칠 때마다, 《일리아스》는 전쟁이 부여하는 영광을 그에 덧씌움으로써 청중의 전율을 경외감으로 바꾼다. 마찬가지로 청중이 전사들의 초인적인 무용(武勇) 및 신들과의 친연성에 경탄할 때마다, 호메로스는 다시 그것이 낳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결과로 초점을 옮긴다. 어느 한쪽으로 환원 불가능한 영웅 묘사의 폭과 깊이는 인간이 어디까지 신에 가까워질수 있고 어디까지 야수에 가까워질 수 있는가 하는, 인간이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를 탐색하기 위해 《일리아스》가 선택한 시적 수단이다.

32쪽 · 김준서, 〈인간 조건의 비극성으로부터 구원을 찾다〉

파시스트 체제가 격파되어도, 전쟁이 끝나도 일상은 바뀌지 않는다. 전쟁터에까지 소녀 병사들을 따라가서 엉뚱함과 발랄함을 선사했던 일상의 힘은 인간미와 온기뿐 아니라 편견과 아집이 축적된 것이기도 하다. 이 일상의 손아귀는 여성 참전 용사들을 전후의 삶에서 밀어내려고 한다. 저 여자들은 분명 전쟁으로 인해 타락했을 거라고, 전쟁에서 죽음의 기운을 몰고 왔을 거라고. 전쟁은 여자의 일이 아닌데 괜히 전선에 다녀와서 우리 민간인의 법도를 파괴하려 한다고. 알렉시예비치는 인습의 관성으로 굴러가는 일상과 소녀 병사라는 독특한 존재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지닌 양면성을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보여준다. 이는 전쟁의 승리 후에 찾아오는 새로운 전쟁, 소비에트 여성이 죽을 때까지 치러야 하는 일상의 전쟁이 히틀러와의 전쟁 못지않게 끔찍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은 것은 전쟁뿐만이 아니다. 일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51쪽 · 이종현, 〈우리는 물고기처럼 입을 다물었어〉

이처럼 게이머가 게임 속에서 어떤 사건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가 아닌 게임이 테러와의 전쟁을 소재로 한 엔터테인먼트 매체로서 더 적합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 게임은 게이머가 게임 속 세계에서 행위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참여적 성격을 띠며, 〈모던 워페어〉 시리즈에서 게이머는 테러의 희생양부터 테러를 막는 영웅의 역할 모두에 참여해 봄으로써 테러와의 전쟁이 정당하며 희생적 시민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보다 쉽게 설득된다.

64쪽 · 이덕균, 〈게이머는 병사로 다시 태어나는가〉

링컨은 물질적, 비물질적 자원 쟁탈을 위한 갈등이 폭력적 갈등으로 변질될 때 여기에 대의적 명분을 제공하거나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에 종교적 담론이 동원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종교 지도자들이 사회의 어떤 계층 혹은 집단과 유착하느냐에 따라 종교는 현상(status quo) 유지에 기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저항이나 심지어 혁명 세력에도 힘을 실어줄 수 있다.(6장) 기존 정치 경제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옹호하거나, 아니면 그 부당성을 비판하거나, 혹은 새로운 유토피아적 체제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식으로 말이다. […] 종교는 보통의 상황에서 윤리적으로 문제시되는 행위들, 즉 살인이나 전쟁마저도 “의로운 행위나 성스러운 의무”(10쪽)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러한 행위의 주체가 자신의 폭력적 행위를 종교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힘을 발휘한다.

97-98쪽 · 서명삼, 〈이라크 전쟁 20주년을 맞아 돌아본 종교와 폭력의 관계〉

왈저는 오히려 전쟁의 도덕성은 그 전쟁이 발생한 맥락(그는 이를 부수적 요인 정도로 취급한다)과 분리하여 고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어떤 행위의 도덕적 정당성 여부를 그 맥락으로부터 고립된 행위 자체에서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러한 관점은 도덕과 정치를 분리하며, 전쟁을 보다 큰 국제 관계에서의 권력과 헤게모니 갈등이라는 맥락에서 분리한다. 그러나 개별적 사건을 그것의 전체 맥락에서 빼내 고찰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석은 그 자체로 추상적이다. 세계는 결코 진공 상태가 아니며, 현실은 힘들의 각축장으로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개별적 행위들은 결코 고립되어 고찰될 수 없기 때문이다.

109-110쪽 · 한상원, 〈전쟁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파농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탈식민은 “이 세계를 인간화”하는 프로젝트이다. 탈식민화란 “어떤 종의 인간을 다른 종의 인간으로 바꾸는 것”이며, 궁극의 목표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이다. 이러한 탈식민화는 양방향으로 전개된다. 식민지 민중이 비참한 현재에서 벗어날 권리를 주장하고 무장 봉기로 기존 질서를 무너뜨려 직접 역사를 실현하기로 결심하면서, 그리고 과거에 행사한 폭력의 부메랑을 맞은 유럽인 옛 지배자들이 힘의 관계가 역전되었음을 자각하고 미래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면서 일어난다.

121-122쪽 · 이헌미, 〈존재의 탈식민화와 세계의 인간화를 위하여〉

이러한 “주석 달린 회고록(memoir with footnotes)” 형식은 자기이론 서술의 전형적 특성 가운데 하나다. 이에 로렌 푸르니에(Lauren Fournier)는 자기이론을 개인의 삶 및 주관적인 몸의 경험을 저자가 의식적으로 이론과 연결시켜 드러내는 서술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이때 ‘이론’이란 학술 담론일 수도 있고, 생각 혹은 실천의 방식일 수도 있다. 푸르니에는 또한 이 자기이론적 서술 방식이 동시대 여성주의자, 퀴어, 유색인 등 예술계 및 학계의 주변부에 위치한 이들에 의한 문화 생산의 ‘시대정신’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평가한다. 

146쪽 · 노민정, 〈남겨진 폭력의 아카이브, 정의의 다정한 얼굴을 찾아서〉

최근의 과학사 연구는 유럽의 과학이 식민지에 수용되는 과정이 바살라가 주장한 바와 같은 일방적 전파의 과정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서구 유럽의 과학이 성립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지역 과학과의 상호 작용이 중요하게 작용했으며, 주변부의 과학 또한 중심부 유럽의 과학이 근대화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196쪽 · 원정현, 〈기후 위기의 시대, 훔볼트를 다시 생각하다〉

이 책은 20세기 대졸 여성의 역사를 흥미진진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그려낸다. 멋진 주인공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사회적 성공도 이루고, 가족도 챙기면서 공평과 평등이라는 최종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서사가 정리된 수치와 여러 개인들의 사연을 통해 펼쳐진다.

바통 이어달리기의 비유는 역사가 수많은 앞 세대의 경험 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지만, 그 배경에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 즉 남성 중심적인 사회 구조와 가부장적 억압은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부당한 차별적 제도와 경험은 책에서도 여러 가지로 소개되지만, 이는 결국 극복되거나 성별 소득 격차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210-211쪽 · 최재인, 〈어떤 바통을 들고, 어디로 달릴 것인가〉

들리니는 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돕기 위해서는 이들이 저마다의 삶을 기초부터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생활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치료나 개선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이들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가족처럼 여기는 태도이다. 그는 당대의 전문가 집단이 아이들을 치료한답시고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온갖 통제와 제약, 그리고 그에 따른 처벌을 강요하는 폭력적인 구조를 비판하면서, ‘이 아이들을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자’는 정신으로 아이들 각자만의 내밀한 삶의 모습 하나하나를 끈질기고 세심하게 관찰한다. “이 아이들에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지, 죽어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 아니다. 이들을 [실제로] 돕는 것이지,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207쪽)

241-242쪽 · 김성재, 〈페르낭 들리니, 혹은 이해 불가능성의 윤리〉

지은이

김준서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독어독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동 대학원 독어독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호메로스 서사시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호메로스로부터 베르길리우스로 이어지는 서구 서사시 전통, 그리고 그리스 신화 속에 묘사된 문명과 야만,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사이 경계의 모호성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이종현
모스크바에서 20세기 러시아 서정시 장르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으로 웹진 《인-무브》에 〈러시아 현대시 읽기〉를 연재 중이다. 옮긴 책으로 LGBT 세계 시선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공역), 마리나 츠베타예바 시 선집 《끝의 시》, 미하일 쿠즈민의 소설 《날개》가 있다.

이덕균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박사 후보. 한국에서 독일 문학으로 학사를, 칸트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나 분석철학에 더 큰 매력을 느껴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연구 관심사는 언어 철학, 행위 철학, 그리고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이다. ‘집단적 언어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서명삼
종교, 정치 그리고 경제가 맞물려 돌아가는 다양한 양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종교인류사회학자이다. 서울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비판적 한국학 센터에서 박사후 연구 과정을 거친 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상원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에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 개념 연구로 석사 학위를,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아도르노의 정치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아우구스티누스, 맑스, 벤야민. 역사철학과 세속화에 관한 성찰》이, 역서로 《공동체의 이론들》(공역),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역사와 자유의식: 헤겔과 맑스의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비판적 사고: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것인가》, 《근대 사회정치철학의 테제들》, 《모빌리티 존재에서 가치로》, 《아도르노와의 만남》, 《왜 지금 다시 마르크스인가》 등을 공저했다.

이헌미
국제정치학자. 한국 외교사와 개념사를 전공했다. 탈식민 국제관계 이론과 젠더 정치로 연구 영역을 넓히고 있다.

노민정
종교학 연구자. 2021년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에서 동시대 한국계 디아스포라 기독교와 아이티 종교의 만남을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뉴저지 드류 대학교 신학부 트랜스내셔널 기독교 및 젠더 스터디 방문 조교수로 있다. 아이티와 프랑스어권 캐리비안 종교사, 동시대 한국 종교와 여성, 인종 자본주의(racial capitalism)에 관심을 두고 연구한다.

박규태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일본 재발견: 일본인의 성지를 걷다》, 《일본정신분석》(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 및 2019 종교문화비평학회 학술상 수상작),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2018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포스트-옴 시대 일본 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옴 사건·일본교·네오-내셔널리즘》(2016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일본 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일본의 신사》,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일본》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국화와 칼》, 《황금가지》, 《세계종교사상사 3》, 《일본 신도사》, 《신도, 일본 태생의 종교 시스템》, 《현대 일본 종교문화의 이해》 등이 있다.

원정현
서울대학교 생물교육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교육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한국 지질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질학과 고생물학 분야의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명과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과학사를 강의해왔다. 지은 책으로 《세상을 바꾼 지구과학》, 《세상을 바꾼 화학》, 《세상을 바꾼 물리학》 등이 있으며, 《아이히슈테트의 정원》에 해설을 썼다.

최재인
미국사 연구자. 인종과 여성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공저로 《19세기 허스토리》, 《서양 여성들, 근대를 달리다》, 《서양사강좌》, 《평화를 만든 사람들》, 《다민족 다인종 국가의 역사인식》, 《여성의 삶과 문화》 등이 있다. 《유럽의 자본주의: 자생적 발전인가, 종속적 발전인가》, 《아름다운 외출: 페미니즘, 그 상상과 실천의 역사》,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 축적》, 《세계사 공부의 기초: 역사가처럼 생각하기》,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네덜란드 여성이 증언하는 일본군 위안소》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김성재
룩셈부르크 대학교와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의 공동 학위로 언어과학, 언어학, 철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브마리 비제티(Yves-Marie Visetti)와 잔 마리아 토레(Gian Maria Tore)의 지도로 박사 연구 〈피아노 마스터클래스를 바라보는 여섯 개의 시선: 음악적 만남의 현상학과 기호학(Six regards sur la master-classe de piano: phénoménologie et sémiotique de la rencontre musicale)〉(2014-2019, 룩셈부르크연구재단 지원 사업)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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