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은유
  • 발행일 2023년 6월 14일
  • 판형 130×205mm
  • 면수 264쪽
  • 정가 18,000원
  • ISBN 9791189433819
  • 전자책 출간 예정

책 소개

희박한 아름다움을 좇아
마침내 시에 도착하는 이들의 이야기

한국 시 번역가들이 전하는 사랑과 감탄의 언어

‘한 편의 시는 “네가 세상에 무엇을 더하였는가?”라는 엄혹한 질문에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에게 글을 쓰는 일은 저 엄정한 물음에 성실하게 대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나의 노동은 세상에 무엇을 더하고 있나. 나는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나. 한국문학 불모지를 개척하는 젊은 번역가들이 사는 법과 직업의 긍지를 조심스레 내놓는다. 문학의 시대는 끝났고 첨단기술이 소설을 쓰고 번역가를 대체하리란 전망이 우세한 시절에 시가, 문학이, 번역이 사람을 살리는 현장 이야기를 얹고 싶었다.

서문 중에서

르포 작가 은유의 신작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가 읻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시’와 ‘사람’을 글쓰기의 두 축으로 삼는 저자가 그 교집합에 있는 존재, 한영, 한일, 한독 시 번역가 7인의 이야기를 담아낸 인터뷰 산문이다. 저자는 읽는 사람으로서 시를 통해 삶의 굴곡을 응시했던 첫 산문 《올드걸의 시집》 이후, 이번에는 묻고 듣는 사람으로서 시 곁에 기꺼이 머무는 이들의 얼굴을 조명한다.

한국, 시, 번역가

한국 현대시 번역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가 좋아서 무작정 시를 읽고 자발적으로 다른 언어로 번역해 퍼나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어디에요? 왜요? 처음에는 말 자체를 못 알아들었다. 외국 시를 한국 사람이 보는 건 익숙해도, 한국 시를 외국 사람이 본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낯선 존재의 출현은 늘 단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서문 중에서

‘AI가 대체할 직업 1순위, 번역가’라는 통계에는 어떤 맥락이 생략되어 있을까. 작가가 작품을 쓴 원어를 ‘출발어’, 이를 다른 나라 언어로 옮긴 번역어를 ‘도착어’라고 부른다. 7인의 한국 시 번역가들은 한국어로 쓰인 작품들을 각각 영어, 일본어, 독일어로 옮긴다(때로는 그 반대의 일도 한다). 이들이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극을 면밀히 살피고 단어를 골라 배치하여 문체와 문맥을 살린 문장들이 독자에게 도착한다. 작품을 깊이 읽고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일이기에 애정이 없다면 지속하기 힘들고, 잘할수록 투명해지는 노동이다. 효율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고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들, 이미 존재했지만 낯을 몰랐던 애정과 노동의 면면을 톺아보기 위해 은유 작가는 질문한다. 시도 번역이 가능한가요? 그 일을 왜 하시나요? 그리고 모든 질문은 결국 당신은 시를 어떻게, 왜 읽냐는 질문에 다름이 없기에 인터뷰이들의 답은 늘 삶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망망한 언어의 지평에서
자유롭고 외롭게 교차하기

내가 잘할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 번역하고 싶은 글을 만났을 때, 뭔가 피가 돌고 약간 상기되는 기분, 그런 기분이 생기면 하게 돼요.

호영, 29쪽

다른 길을 걸어가야 된다는 걸 깨닫고, 다른 길을 걸어도 살 수 있다는 걸 믿었어요. 저는 처음으로 저를 믿었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저를 믿었어요.

알차나, 169쪽

7인의 번역가들은 모두 ‘문이 있으니 열었다’라고 말하듯 담담히 운명으로서 번역을 말한다. 그것은 때로 무구하고 호기로운 마음을 따라―“바보가 되는 것과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좋아한다”(소제), “(문학이) 그렇게 재밌는 것이라면 나도 한번 해보자”(승미)― 때론 진동하는 삶을 수용하기 위해― “언어는 도망갈 수 있는 출구 같은 거예요”(박술), “처음에는 고민했는데 이젠 그냥 내가 두 아이덴티티 사이에서 계속 불안과 사랑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새벽)― 한 시절을 치열하게 언어에 천착한 사람들이 견지할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

인터뷰에 참여한 번역가들은 거의 이민자나 유학파로서 언어와 학력 등 문화자본을 가진 주류에 속하지만, 백인 중심적인 문화에서 혹은 가부장제 사회의 논리 안에서 근원적인 억압과 차별을 경험했다. 이때 문학 번역은 “퀴어와 논바이너리 정치를 논의하고”(호영) 동양인 멸시에 맞서 “우리도 감정과 생각이 있는 사람”(안톤 허)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운동으로서의 예술’로 기능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시를 연장처럼 쥐는 한편, 최고의 언어 학습법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는 속설이 있듯 이들은 모두 어떤 사람, 작품, 혹은 언어 자체의 팬이다. “하염없는 몰입”의 반짝이는 순간을 묘사하는 이들의 “감탄하는 능력”은 대화 안에서 공명하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의 한 시절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시”(은유)의 기억을 소환시키기도 한다.

번역 ‘노동자’

책에는 번역 현장에 있는 노동자의 기쁨과 슬픔도 가감 없이 담겨 있다. 일상에서 듣게 되는 “‘번역은 쉽잖아’ ‘번역은 창작이 아니잖아’라는” 함의가 담긴 무게 없는 말들에서부터 “비백인 번역가의 자리를 지우는 영미권 출판계”(안톤 허)와 “시를 읽는 문화가 부재하는”(박술) 현실. 자리 뺏기 싸움처럼 문학 번역 안에서도 상업성의 논리에 따라 지원의 파이가 나눠지는 시스템까지. 아름다운 작품을 발견하는 밝은 눈과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시간과 힘을 쏟는 이들 번역가의 아낌없는 태도는 핍진한 현실과 대조되며 무체계와 비합리의 구조를 역설하기도 한다. 하지만 외려 그들은 “시 독해와 번역은 정답이 없다. 이러한 혼돈과 불확실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번역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은유 작가의 묘사처럼, 시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가로지르며 “무언가를 이겨내려면 그 힘은 공동체에서 온다”(소제)는 소신에 따라 한국문학 불모지에 균열을 꾀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불순물이 없는 게 순수가 아니라 불순물까지 보는 게 순수다.

서문 중에서

비로소 우리에게 도착한 문장들이 한 번역가가 생을 통과하며 체화한 감각으로써 읽는 이를 상상하며 건네는 대화임을 상상하게 되었다면, 번역가의 일이 기계로 대체된다는 전망은 이제 독자에게 드리운다. 당신은 시를 어떻게, 왜 읽는지. 미래에는 어떤 대화가 우리에게 남을지.

은유 작가의 문장으로 오해의 자리를 비워두며 자신의 해석을 믿고 나아가는 호영의 단단한 시선을, ‘번역 판’을 만들고 키우는 안톤과 소제가 관료화된 시스템에 던지는 질문들을, 한국어를 사랑해서 시 번역가가 되었다는 알차나의 넉넉한 사랑을, 일상과 번역일을 함께 운용하며 겪은 실패의 경험을 풀어놓는 승미의 소탈함을,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완결되지 않을 질문을 품고 시를 번역하는 새벽과 술의 혼란을 모두 읽은 후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번역가의 상은 사뭇 달라져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기어코 시에 도착하는 사람들, 그들의 꼿꼿한 문학에의 사랑은 우리가 잊고 지낸 시적 사유에 대한 나름의 답변이 되어준다.


차례

시에 도착하는 사람들(은유) ‥‥ 5

즐거운 오해(호영) ‥‥ 19
하지만 저는 해요(안톤 허) ‥‥ 53
동화가 잘되는 편(승미) ‥‥ 127
초과 선언(소제) ‥‥ 93
반짝반짝 한국어(알차나) ‥‥ 165
엄마 이상 스피릿(새벽) ‥‥ 199
아름다움 교섭하기(박술) ‥‥ 231

주 ‥‥ 260


책 속에서

당연히 시는 번역하기 어렵죠. 시는 어쨌든 언어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특별히 이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경험을 만드는 장르니까 더 어렵죠. 근데 우리가 소통을 할 때 오해를 감수하고 말하는 것처럼 시 번역도 그냥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 중에 하나 아닌가 싶어요. 그걸로 누군가랑 이어질 수 있다면, 그걸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랑 만날 수 있다면……. 저는 번역을 할 때 그 독자들한테 애정을 보내는 느낌이에요.

호영, 47쪽〉

그만의 느낌, 무의식 같은 ‘즉각적으로 보는 능력’에서 나온 표현은 명쾌하고, 느린 랩처럼 귀에 쏙쏙 박히는 리드미컬한 말투는 대화의 유희를 더했다. 나는 원고를 쓰면서도 혼자서 크큭큭 웃다가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했는데, 가장 멋진 말, 가장 신나는 말, 그래서 가장 그다운 말을 꼽으라면 이거다.

“그 책을 보자마자 너무나도 너무나도 번역을 하고 싶었어요.”

안톤 허, 88쪽

헐뜯지 않기. ‘이것도 번역이야?’ 이런 말 하지 않기. 어떤 말도 가시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조심해요. 《초과》는 원본을 손상하지 않는 한 다른 관점을 허용해요. 시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게 시의 목적이잖아요? 각 언어의 다층적 의미를 허용해요. 그렇지만 제 기준을 없앨 수는 없고, 같은 감정이라도 다르게 표현을 하죠. 이 번역은 ‘이런 단어 선택에서 과감하다’고 한다면 그 이유나 증거를 대줘요. 이 단어 선택을 다른 사람들의 단어 선택과 비교하고, 누가 제일 잘했다는 느낌을 없애려고 해요.

소제, 109쪽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와 한국어의 관계는 사랑 이야기 같아요. 사람들한테도 나는 수많은 언어와 데이트하다가 결국은 한국어와 결혼했다고 말해요. 한글이라는 언어는 저한테 큰 의미예요. 왜냐하면 처음으로 제 인생에서 아무 도움 없이 시작했고 제 궁금함을 따라가기 시작해서 이렇게까지 왔어요. 한국어는 제 힘을 대표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어 책을 읽을 때마다 한국어 문장을 볼 때마다, 제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알차나, 179쪽〉

“저는 번역을 몸으로 하거든요. 번역하는 문장이나 대사들이 제 몸을 한번 통과해야 ‘딱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뭔가 연극을 하는 느낌이에요.”

“몸을 통과한다는 게 어떤 건가요?”

“온전히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 마음이나 상태가 되어보려고 노력해요. 등장인물이 친구를 잃어버렸다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면 저도 그 마음 상태가 계속돼요.”

승미, 147쪽

새벽은 한 인터뷰에서 번역에 관한 메타포로 베르길리우스의 장편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빗대어 말했다. 죽은 아내를 안기 위해 세 번이나 시도했지만, 망령을 붙잡으려는 시도에 그친 것처럼 “번역가는 자신의 원본 텍스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고.

새벽, 214쪽

시 번역은 결과물이 시여야 하죠. 결과물이 아름답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오히려 원본보다 아름다워도 돼요. 번역은 도착어가 아름답게 느껴져야 되니까 저는 심한 직역도 허용해요. 출발어에만 있고 도착어에는 없는 구조를 억지로 넣는다거나, 문장구조든 단어 모양이든 낯선 게 들어오는 게 좋아요. 이 언어로 쓰일 수 없는 외향을 가지되 아름다우면 좋겠어요.

박술, 236~237

지은이 | 은유

르포 작가.

2012년 시를 곁들인 산문집 《올드걸의 시집》을 첫 책으로,

세 권의 글쓰기 책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두 권의 산문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다가오는 말들》,

다섯 권의 인터뷰집 《폭력과 존엄 사이》 《출판하는 마음》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있지만 없는 아이들》 《크게 그린 사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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