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이산화
  • 발행일 2024년 1월 22일
  • 판형 128×210mm
  • 면수 208쪽
  • 정가 15,800원
  • ISBN 9791193240212
  • 전자책 미출간

책 소개

“그래, 아까 달에 갔을 때 뭘 봤느냐고 물었지?
이제야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겠군.”

미지의 풍경에 숨겨진 열두 가지 이스터 에그
황도 12궁, 올림포스 12주신, 12간지, 마제스틱 12…
낯선 세계의 한 단면을 비밀스럽게 들춰 보이는
1년 열두 달간의 여정

2018년, 2020년 SF어워드 중단편 부문 우수상, 2023년 장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며 면밀하고도 신선한 작품 세계로 주목받은 이산화 작가의 초단편소설집 《전혀 다른 열두 세계》가 읻다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작가가 2022년 1월부터 12월까지 《고교 독서평설》에 연재했던 열두 편의 짧은 글들을 수정하여 엮은 것으로, 1년간의 치열한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정된 지면에서는 풀어놓지 못했던 해설과 뒷이야기가 담긴 〈열세 번째〉 글과 〈작가의 말〉도 함께다. 작가는 이 글에서 인물, 세계, 사건 등의 작은 실마리도 살뜰히 밝히며 이산화 작가의 작품 세계를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독자들부터 장르 문학에 처음 발을 들이는 SF 초행자들까지 두루 반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규칙은 작가가 매달 각기 다른 ‘열두 가지로 이루어진 것 가운데 하나’를 소재로 선택해 그 힌트를 소설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는 것이다. ‘12’라는 숫자로 느슨하게 연결된 낯설고 기묘한 열두 편의 짧은 이야기. 수수께끼의 정답을 확인하는 것처럼 소설 끝에 실린 〈열세 번째〉 글과 〈작가의 말〉까지 챙겨 읽는다면 독자는 이 단편들이 모두 밀도 높은 과학적 상상력으로 짜여진 “이상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끝에 품게 되는 질문은 열세 번째 열네 번째 세계로 뻗어나가며 우리 안에서 오래 공명할 것이다.

열세 번째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제가 아닌 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또 어떤 형태의 세계가 가능할까요? 우리의 육체가,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어떤 방식으로 바뀌고 뒤틀리고 부서질 수 있을까요? 변화의 결과물은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일까요, 완전히 다른 모습일까요, 아니면 둘 다일까요? 우리는 여전히 그 모습을 지금처럼 맡고, 보고, 들을 수 있을까요?

열세 번째 중에서

본 작품의 내용은 전부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의 발언 및 행적과는 무관합니다.

얼마든지 부풀고 뻗어나가며 맥동하는 몸. 거대한 폐와 성대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녹색 파이프오르간. 오직 멋진 노랫말을, 화끈한 고함을 외치기 위해 검은지빠귀가 스스로 고안해 낸 결과물이었다. 당연히 옛날에는 감히 존재할 수조차 없었을 형상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유리양파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몸의 반짝임이 눈에 새겨져 도무지 지워지질 않았으므로.

행복이란 따스한 반죽 중에서

이산화 작가는 이 책에서 색실을 잣고 천을 짜듯 반짝이는 장르적 아이디어들을 열두 편의 이야기로 편직해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생물학의 위험한 경계에 뛰어드는 세계부터 누구나 언제든 연금술사처럼 자신만의 생명체를 손수 빚어낼 수 있는 세계, 의도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이 용이 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세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을 점령한 ‘서버’의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고 멈추는 세계, 지구에 접촉한 외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세계, 9차 혁명 이후 반죽 같은 몸을 가진 인류의 세계, 행복이 전염병이 된 세계 등등. “생물학의 경이와 신체 개념의 변형·확장을 주요 소재로 삼아, 인간과 과학이 실수하고 좌절하며 위험한 경계선에 도전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즐겨 쓴다”는 작가 소개에 걸맞게 모든 이야기는 예측불허한 미지의 사건이 쏟아지는 곳으로 독자를 이끈다.

이 글들은 때론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기도, 작금의 세태에 대한 풍자 같기도 하다. ‘인간성’에 대한 오랜 믿음, ‘인간종’의 이기성과 ‘세대교체’와 ‘종말’에 대한 실체 없는 두려움, 우리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결정에 따라 뒤바뀌는 세계 등등 작가는 SF 장르만이 가능한 다채로운 방식으로 독창적인 개별 세계를 빚어내면서 지금—여기에 유효한 의문점을 짚어낸다. 그러나 그가 〈열세 번째〉 글에서 “압수수색은 정중히 거절”한다고 여러 번 말하는 것처럼 현실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면 우연일 뿐, 각 단편은 정교하게 짜인 픽션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들이 거울처럼 현실을 비추는 이유는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은 결국 관성을 비틀어 현실 세계를 다른 감각으로 바라본다는 것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열두 가지의 새로운 관점으로, 현실의 테두리 바깥에서 현실을 응시하는 작품. 이산화 작가의 《전혀 다른 열두 세계》다.


차례

토끼 굴 · 7

그땐 평화가 행성들을 인도하고 · 19

위에서처럼 아래에서도 · 31

이무기 시절도 한때 · 43

새로고침 · 55

지구돋이 · 67

증오가 명예로웠던 시절에 · 79

샛길의 독사 · 91

행복이란 따스한 반죽 · 103

1324 · 115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새끼고양이였다 · 127

구세주에게 · 139

열세 번째 · 151

작가의 말 · 199


책 속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세요. 토끼는 그냥 발견이 아닙니다. 생물에 대한, 자연스레 우리 자신의 육체에 대한 이해를 뿌리부터 뒤집을지도 모르는 발견이라고요. 그리고 인간의 뇌는 그런 충격을 받길 원하지 않아요. 근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믿기 힘든 광경을 보면 잊어버리려 온갖 애를 쓰죠. […] 멜, 우리들의 뇌가 토끼에 대해 진정으로 알길 거부하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P.12-13

재차 말문이 막혀버린 채, 형혹은 정면에서 반짝이는 두 눈을 그저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수수께끼 같은 감정의 연쇄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눈.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형혹에 대한 이해가 뚜력하게 형체를 갖춘 채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형혹은 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세성은 형혹을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

P.27

갈색 코트 아래로 껑충 뻗어난 다리. 원래의 두 배쯤 늘어나서 유연하게 뒤로 휘어진 목.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사이를 헤치고 피어나 연신 접혔다 펴졌다 하는 흰색 깃털들. 인기척을 눈치채고서 이쪽으로 돌린 눈동자에는 복잡한 오색 빛이 만화경처럼 일렁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만면에 지어 보인 특유의 경쾌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란이 반갑게 흔들어대는 손의 형태를 어림짐작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다. […] 그 모습이 뜻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해 봄에 설란은 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P.45

그랬더니……지구가 보이더군. 놈들에 비하면 한없이 가냘프기 짝이 없는 행성 하나가, 놈들의 터전인 광대한 어둠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어. 그때 깨달았지. 우주 저편에 아무리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살고 있을지언정 저 행성만큼은 수십억 년 동안 우리의 은신처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을. 저 작고 푸른 행성만 건재하다면 우주의 그 모든 광기와 혼돈 속에서도 희망은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래, 아까 달에 갔을 때 뭘 봤느냐고 물었지? 이제야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겠군.

p.78

“[…]우리가 내린 모든 결정은 적과 싸우고, 적에 대해 알고, 그러는 동안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일이었어. 그리고 전쟁에서는 적을 증오할 수밖에 없지. 이해하겠나? 그땐 증오가 명예로웠던 시절이었네.”

p.87

얼마든지 부풀고 뻗어나가며 맥동하는 몸. 거대한 폐와 성대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녹색 파이프오르간. 오직 멋진 노랫말을, 화끈한 고함을 외치기 위해 검은지빠귀가 스스로 고안해 낸 결과물이었다. 당연히 옛날에는 감히 존재할 수조차 없었을 형상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유리양파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몸의 반짝임이 눈에 새겨져 도무지 지워지질 않았으므로.

p.111

계절이 바뀔수록, 북반구 다음에는 남반구를 향해, 달콤한 환상은 차례차례 현실을 집어삼켜 갔다. 질병과 맞서 싸우기 위한 시스템은 맞서 싸우고픈 마음조차 들지 않는 행복이란 증상 앞에서 철저히 무력했다. 인간의 이성이 쌓아 올린 문명은 토대인 이성 그 자체를 공격하는 재난을 견뎌낼 방도가 없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화면 속 랜슬롯 박사의 눈에서도 우윳빛 눈물이 뚝뚝 떨어지던 모습을 은정은 어렴풋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p.133

지은이 | 이산화

SF 작가. 생물학의 경이와 신체 개념의 변형‧확장을 주요 소재로 삼아, 인간과 과학이 실수하고 좌절하며 위험한 경계선에 도전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즐겨 쓴다.

쓴 책으로는 장편소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밀수: 리스트 컨선》, 연작소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 단편집 《증명된 사실》이 있으며 이외에도 여러 앤솔러지와 잡지에 다수의 단편을 게재했다.

2018년에 〈증명된 사실〉로, 2020년에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로 각각 SF어워드 중단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23년에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로 장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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